페미니즘은 90년대 들어서 국내외의 사회 변화로 인해 급격하게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성의 열악한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어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적, 사회적 장치와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은 여전히 잔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페미니즘의 내일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1975년 엘렌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으로 촉발된 ‘프렌치 페미니즘 French Feminism’이 미국대학의 캠퍼스를 광풍처럼 휩쓸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프랑스적인 현상을 넘어서서 미국의 문화적 토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우리는 왜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프랑스 페미니즘의 일부분, 즉 프랑스에서 글을 쓰는 몇몇 여성들의 작업에 한정된 지적이고 문학적인 움직임을 프랑스 페미니즘의 표징으로 삼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페미니즘 이론의 대부분을 영미 계통의 저서를 통해 수입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미국산 프랑스 페미니즘의 기계적인 수용 가능성은 매우 크며 그리하여 프랑스 페미니즘이 갖고 있는 다양성이나 풍요로움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렌치 페미니즘’은 ‘여성적 글쓰기’의 실천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엘렌 식수는 “글쓰기에 대한 여성적 실천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한계도 중심도 모르는 여성의 리비도와 남근 중심적인 남성의 리비도를 대비시킴으로써 여성의 육체를 중심으로 한 유동적이며 다원적인 여성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조망한다.

식수의 이와 같은 발언과 때를 같이 하여 7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 텍스트들은 ‘여성적 글쓰기’란 단일한 이름 하에 조직된 것은 아니지만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을 반영한다. 여기에 60년대 말에서 70년대 라깡, 푸코, 데리다, 바르트, 들뢰즈 등 프랑스 탈구조주의자들의 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로고스 중심주의에 더 이상 복종 하지 않는 그런 글쓰기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여성적 글쓰기의 전략은 글쓰기를 남성 아방가르드의 전유물로부터 해방시켜 보통 여성들의 표현 영역으로 만들어 말중심주의를 거부하고 문자중심주의를 향한 교두보가 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왜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프랑스의 여러 다양한 이론중에서도 이런 여성의 정체성과 성적 특성에 기초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주장하는 작가들의 이론만을 프랑스 페미니즘의 주류로 인정하려는 것일까? 여기에는 물론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다수가 대학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수들로서 라깡의 정신분석이나 데리다의 해체이론 등 탈구조주의자들의 이론적 성찰에 강한 매혹을 느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케이트 밀레트가 주장하는 해게모니 쟁취 투쟁이 결국에는 페미니즘을 또다른 권력 담론으로 작용하게 할 위험이 있으므로 남성과의 동일시나 평등보다는 여성의 차이나 여성성을 강조하며 여성만의 고유한 담론을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식수나 이라가라이의 인식에 동참한다. 특히 미국에 널리 퍼져 있는 학제간 연구는 프랑스 페미니즘을 미국내에 활성화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이 학제간 연구에서 지배적인 것은 문학 연구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 페미니즘에 관해 글을 쓴 대부분의 미국학자들이 프랑스 문학전공자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국 정신의 프랑스 식민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점에 대해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새로운 이론적 성찰에 대한 강한 매혹과 더불어 프랑스 이론의 미국으로의 전파에 앞장섰다는 점에서는 프랑스 문화에의 종속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이론을 그 이론이 태어난 맥락이나 역사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수용·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입증한다.

즉 지배적 위치에 있는 것은 프랑스 페미니스트가 아닌 미국 페미니스트들인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 문화의 일부를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며, 프랑스적인 것을 자신들과는 무관한 이국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산 프랑스 페미니즘에 대해 프랑스에서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보부아르를 필두로 한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미국산 프랑스 페미니즘과 프랑스에서 현재 진행중인 운동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은 프랑스 내외 이론가들과 운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대립을 은폐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보부아르가 페미니즘의 위험으로 지적하는 ‘정신분석과 정캄그룹은 68년대에 창설된 여성해방운동의 한분파로 MLF라는 공식 약호를 사용하며 프랑스적인 모델을 정신분석학적인 모델로 나아가게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운동이 대체적으로 혁명적 페미니스트, 계급투쟁, 정신분석과 정치라는 3개 그룹으로 나뉘어진다면, 이것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진보적, 사회주의적, 급진적 페미니스트운동에 상응한다.

이중에서도 프랑스의 ‘정신분석과 정캄는 본질주의적 관점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문화적/급진적 페미니즘과 유사하지만, 여성의 주체성과 라캉의 정신분석에 기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프렌치 페미니즘’의 주자인 이리가라이·식수·크리스테바 등이 활동한 것도 바로 이 그룹으로, 출판사와 서점을 가진 그룹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보부아르가 ‘정신분석과 정캄의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론가들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권력 투쟁에 가담하고 있을 때 이들 이론가들은 이런 투쟁과는 무관한 채 오로지 여성성이라는 이론의 구축에만 전념했다는 것이 보부아르의 비판의 논지이다.

즉 그녀에 따르면 ‘정신분석과 정캄그룹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성 차이에 따른 특수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본질주의자들로서 여성의 의식화나 주체화에는 관심이 없는 ‘반페미니스트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프랑스와 미국의 페미니즘 논쟁을 계몽주의 전통에 대한 논의에서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오즈프에 따르면 프랑스 페미니즘의 운동은 계몽주의의 보편주의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프랑스 여성들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의하기 이전에 우선 인간으로 정의하며 남녀간의 성적차이는 인간이 평등과 보편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종속되는 하위개념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여성들은 결코 자신을 프랑스의 역사나 전통에서 소외된 타자나 ‘소수 민족’으로 보지 않으며, 따라서 남성은 적대자나 억압자가 아닌 동반자로 인식한다.

이에 반해 성과 인종과 계급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 작업의 정치적인 파장에 특히 민감한 다인종국가인 미국의 학자들은 ‘타자’로 존재하던 여성을 ‘차이’로 수용함으로써, 본질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규정들을 해체하고 개별적이고도 주변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 소수문학 연구 또는 탈식민주의문학 연구에 페미니즘이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할 기반을 구축한다.

이처럼 ‘프렌치 페미니즘’이란 말이 프랑스적인 전통과의 차별화를 꾀하고자 하는 미국대학 교수들, 또는 프랑스 내에 존재하는 이론가들과 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이든 간에 토릴모이의 지적처럼 차이의 페미니즘을 단순히 평등의 페미니즘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의 일차적인 목적이 남근중심주의적인 사회의 억압을 고발하고 인간이 아닌 여성을 인간의 대열에 진입시키는데 있다면 낭성의 가치가 아닌 여성의 가치로 대응한다는 것은 가부장적인 구조안에서 가장 효과적인 유일한 전략일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의 주된 표현이 데리다와 라깡의 보호체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이제 그것은 ‘언어의 탈영토화, 직접적인 정치 문제에 귀속된 개인, 언술 행위의 집단적인 표현’으로 특징 지워지는 데리다와 가타리의 소수문학에서 그 울림을 발견한다.

보부아르에서 크리스테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이 줄기차게 추구해온 것도 바로 이 소수의 창조적 생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불가능의 지평을 향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울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 글을 쓴 김희영씨는 한국외대 불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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