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보안법 시대 유감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 존폐에 관한 논란의 쟁점들을 차분하게 분석하는 장점을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언론과 학자들에 의해 많이 논의되어온 쟁점이기 때문에, 기존에 논의되어 온 쟁점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창의적인 논점을 추가하는 노력이 잘 두드러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사안의 성격상 법률조항의 인용이 불가피하긴 하지만, 짧은 글속에서 법률조항을 너무 길게 인용하거나 갑자기 법률용어가 등장할 경우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의 독서흐름에 장애가 되어 논지 전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문장에는 큰 문제는 없지만, 가끔씩 감정이 조금 지나치게 실린 문장표현이 등장하여, 전반적인 설득력을 오히려 줄이는 작용을 하고 있는 점이 다소 거슬린다. 가작으로 추천할 수 있는 글이지만, 당선작 수준에 오르려면 조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고등학교 영화교과서

짧은 글도 집약적으로 쓰면 긴 글보다 설득력을 높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설득력이 약한 글이 되어버린다. 이 글의 경우 고등학교 교육제도가 성찰성을 키우기보다 암기방식에서 맴돌고 있으며, 그런 일이 영화교육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전반적인 논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고등학교 교육 현실에 대한 또 한번의 확인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영화교과서라는 참신한 소재를 발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재를 글의 핵심으로 끌고 들어와 글을 전개하려는 노력의 긴장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된다.

글쓴이의 글 속에서 영화교과서는 고등학교 교육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사소한 소재로 의미가 축소되어 되어버렸는데, 그러다보니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영화라는 한 예술의 장르를 통해 고등학교 교육이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새로 사고해볼 기회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충족시키기 어렵게 되었고, 그렇다고 고등학교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일반론적 지적 이상의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남게 될 뿐이다.

하나의 소재를 끈질기게 밀고나가는 글쓰기가 필요해 보인다. 둘째 쪽에서 문단이 너무 짧게 나뉘어 있는 점도 하나의 쟁점을 지속적으로 고민해서 글로 전개하려는 지속성이 약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 보인다.

3. 제목없는 글: 이라크 파병과 언론

이 글은 제목이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 누구의 실수로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제목은 글을 집약적으로 요약하는 출발점이자 끝이기 때문에, 제목이 없는 글은 나침반없이 항해에 나서는 것처럼 길찾기의 어려움을 증가시킨다. 일단 글은 전쟁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 태도를 비판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언론이 보이는 태도가 유사함을 비교하고 있는 점에서 참신한 접근이기는 하지만, 세 나라의 언론의 행태가 나열되고 있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언론의 태도가 그렇게 나타나는 이유가 지배력이 철저하게 관철되기 때문인지, 언론의 이해관계가 정부의 요청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인지 등에 대해 읽는 사람은 좀 더 궁금해지는데, 그에 대해 특별하게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주고 있지는 못하다.

마지막 절의 이탈리아의 반전운동에서 배우자는 것이 결론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이야기되고 있지는 않으며, 다만 이탈리아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만이 제시되고 있다. 그럼 다른 사회에도 비슷한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주장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왜 그럴수 있는지를 쓰려다가 빠뜨린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4. 양자물리학을 통한 교육제도의 변화에 대하여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양자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시야를 도입한 흥미로운 글이다. 그렇지만 이런 좋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논지가 글 속에 잘 스며들어서 설득력 있게 전달되고 있지는 못하다. 짧은 글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는데, 그러다보니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고 교육제도의 문제도 지적해야 하고,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야하는 여러 가지 고민이 생기게 된다.

문제를 줄이려면 뉴튼역학과 양자역학의 차이점을 교육제도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측면에 한해 알기 쉽게, 그리고 분석적으로 정리하여 이것을 그 다음 논지에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본론의 교육제도 비평에서 동원되는 논리는 주로 교과목들의 유기적 연결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굳이 양자역학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이에 대한 비판은 많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학문의 구획화를 깨고 학문간의 교류를 확대하자는 최근의 여러 노력들, 그리고 지역연구나 문화연구 등의 실험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그럼 왜 굳이 양자역학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글쓴이가 양자역학과 관련해 제기하는 중요성은 사물의 상호연관성과 확률적 세계관인데, 이중 확률적 세계관은 교육제도와 관련해 특별히 다시 언급되고 있지도 못하다. 문장 또한 좀 더 깔끔하고 문법적으로 맞는 형태로 쓸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5. 국가보안법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국가보안법이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이에 대한 상이한 입장의 논의들을 신문지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은 그런 쟁점들을 주로 ‘이현령비현령’이라는 주장으로 정리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글쓴이는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국보법이 사회억압을 위한 전방위적 검열기제로 작동한다는 점을 중시한다.

이 글의 창의성을 찾자면, 오히려 이 부분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분량으로 보면 국보법의 자의성을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이 글의 절반이 되고, 이 검열기제와 관련된 주장은 한두가지 사례 제시와, 이런 검열기제가 사회의 다른 검열법률 제정으로 확대된다는 지적에서 그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신문논조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지적으로 돌아오고 있다. 글쓴이가 제목에서 제시한대로 국가보안법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글쓴이가 더 큰 문제라고 제기한 부분과 관련하여 논의될 이야기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것은, 이런 검열기제가 단순히 국가보안법이 다른 법으로 대체되거나 그 법률적 내용이 형법으로 이관된다고 사라질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글쓴이가 논의를 더 전개해야 글의 힘이 생길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언급이나 사고의 발전이 없기 때문에 글이 끝맺음이 모호해지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된다.

6. 웰빙... 대중매체와 허상에 의해 발가벗겨진 현대인

요즘 사회적인 관심이 되고 있는 웰빙이라는 주제를 매우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로 차분하게 분석하고 있는 뛰어난 비평이다. 글쓴이는 이 주제에 대해 고찰하면서, 누가 웰빙붐을 주도하고 있는가, 왜 많은 현대인들은 이 웰빙붐을 따라가고 있는가, 웰빙붐은 더 큰 사회구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다루며, 그런 성찰을 거쳐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웰빙이 원래 채워야했던 핵심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절한 곳에서 등장하는 다른 사상가나 활동가들의 예는 글의 설득력을 높여주고 있으며, 독자보다 먼저 흥분하는 성급한 글쓰기가 아니라 차분한 논지로 한단계씩 진전시키는 글쓰기는 읽는 사람의 동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고 보인다. 당선작으로 추천하기에 손색이 없는 글이다.

7. 교육에서 계급의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자

이 글의 제목은 하나의 요청을 담고 있다. 이 글이 이 제목의 요청에 부응하는 설득력을 지니려면 그에 충분한 논거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짧은 글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긴 두개의 신문보도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두가지 신문보도 모두 교육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면서 계급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의 시트콤의 고시생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그에 대립하는 글쓴이의 서술은 논거라기보다는 주장으로 그치고 있다. 교육문제를 볼 때 이런 방식의 은폐하는 접근법을 버리고 계급문제를 중심에 놓자는 주장이다.

만일 여기까지가 문제제기이고, 그 다음에 교육에서 계급의 문제를 어떻게 정면으로 언급할 것인지를 서술한다면 하나의 논문의 서술방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완결된 한 편의 사회비평의 글로서는 이 글은 핵심적 주장의 논거를 충분히 제시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설득되지는 못할 것이다. 글은 그것을 읽음으로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그 사고촉발의 요소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 백승욱씨는 문과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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