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준비한다. 삶에서 나온 시민의 '생생한' 지식이 필요하다
  • 중대신문
  • 승인 1998.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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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부터는 ‘21세기를 준비한다’ 그 마지막 주제인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하여’를 연재하고 있다. 지나치게 소수 엘리트 계층에 편향되어 추진되는
오늘날의 과학기술정책을 비판하고, 과학기술정책추진과정에 시민들의 목소
리를 반영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과학기술에 있어 전문가 이데올로
기를 타파하고 전문가와 시민의 만남을 통해 보다 생태친화적이고 인간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높아가고 있어 이제는
그 어떤 사람도 과학기술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에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는 과학기술은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하는 뿌리깊은 전문가 이데올로기가
낳은 결과이다. 전문가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사회의 다른 영
역과는 달리 복잡성과 난해함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처
할 수 있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만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가주의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적으로 볼 때
1970년대 이후에는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시민참
여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러한 시민참여의 강도와 방법들이
더욱 심화·발전되고 있다. 과학기술 사회학, 혹은 과학기술 정치학의 연
구결과들에 따르면, 과학기술과 관련된 정책이나 이슈들도 순수하게 과학적
혹은 기술적 문제만은 아니며, 많은 부분에서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정치
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먼저 우리는 과학기술이 전문가만의 독점영역으로 머물러서는 안되고 시민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두가지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는
과학기술의 공공성이며, 또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일반시민의 지식(lay
knowledge)이 갖는 중요성이다.

첫째, 과학기술은 기본적으로 공공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대부분의 과학기술은 그 영향의 범위가 매우
포괄적이어서 사회의 대다수의 시민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과학기술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아울러 정부에서 추진하고 과학기술 연구개발 프로그램은 그 재원을 시민
들의 세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연히 공공적 성격
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공공적 성격은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을
곧바로 제기한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이란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에게 포
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세금이 특정한 과학기
술활동의 재원으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기술의 개발방향과
내용에 대한 시민 참여에 기초한 민주적 통제는 민주사회에서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권리주장이 될 수 밖에 없다.

둘째, 과학기술과 같이 복잡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
도 시민들은 자신들이 일상적 삶 속에서 축적한 경험적 지식이나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해결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통상적으
로 일반인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영역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바
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가의 지식은 주로 교과서나 통제된 실험실에서
의 탐구활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임에 반해, 일반인의 지식은 주로 삶의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과학기술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러한 과학기술의 환경에 오랫동안 놓여져 있던 일반인이 오히
려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생생한’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과정에서 전문가와 시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서구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
자.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와 과학상점(science shop)이 그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결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단계의 토론과정에 일반 시민이 참여하고 이러한 토론참여
는 다시 사회적인 토론과 논쟁으로 확산되면서 과학기술의 대중화와 동시에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 시민의 정책참여를 촉진하는 새로운 대안적 모델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합의회의라고 불리고 있다. 합의회의는 ‘선별된 일단의 보
통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논쟁적이거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적 혹은 기술적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에게 질의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
들의 대답을 청취한 다음 이 주제에 대한 내부의 의견을 취합하여 최종적
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하나의 포럼(forum)’이다.

합의회의는 일반인들에게 특정한 기술개발에 대해 평가하고 그 기술개발이
가져올 사회적 결과들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일반인들은 이 합의회의에 임할 때 그들의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기본적인 “상식”에 기초하여 주어진 주제에 대해 관련 전
문가들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일반인들에 의해 제기된 질문은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응답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합의회의는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과학기술 이슈에 대
한 정책결정의 과정에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도 반영되는
시민참여적 과학기술정책의 형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과학상점은 197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에 설립된 것을 시발로
하여 현재에는 네덜란드에 있는 모든 대학에 설립되어 있고, 독일, 벨기에,
프랑스, 덴마크, 영국, 그리고 미국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제도이다. 과학
상점의 일차적인 목적은 대학내의 실험실이나 연구소가 지역 주민들의 수요
와 요구에 기초한 사용자 친화적인 연구개발활동을 함으로써, 과학기술활동
이 사회와 유리되지 않도록 지역사회 내에서 과학기술과 일반 시민들을 연
결시키는 데 있다.

과학상점은 지역에서 주로 재정능력이 낮은 시민단체나 여성단체, 세입자
단체, 노동조합 등으로부터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항에 대한 도움을 요청받
으면 학생(주로 대학원생)과 이 일에 무보수로 자원봉사하는 전문연구진들
이 요청자들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과학기술적 연구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학
내의 공간이다.

시민은 단지 피동적으로 기술적 원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관점에서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를 전문연구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함과 아울
러 자신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 능력을 배양하게 된
다.

결국 과학상점은 지역적 수준에서 과학기술 연구개발활동의 방향설정에 시
민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특한 시민참여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학기술 영역이라고 해서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
가들만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과학기술의 민주
화, 즉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없이는 과학기
술의 진흥 자체가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가 이데올로기
가 해체되고 시민참여가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과학기술의 민주화,
혹은 시민과학(Citizen Science)의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의 각성과 전문가
의 적절한 자리매김을 통해 전문가와 시민사이의 원활한 소통에 기반한 상
호학습의 사회적 확산이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이영희<카톨릭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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