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터미널’에서 동유럽의 소국 크라코지아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빅토르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미국의 관문인 JFK 공항에서 크라코지아 정부가 쿠데타로 몰락해 버렸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빅토르는 정부가 없으니 여권이나 비자의 효력이 없어져 비참하게 공항에 버려진다. 하지만 빅토르가 그 곳에서 불운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휴머니즘’에 처참히 깨지고 만다.

이 영화는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는 자본주의와 인권을 위한 전쟁 등이 휴머니즘이라는 명목 하에 아름답게 비춰지는 것이라는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휴머니즘과 폭력』에서도 이와 같은 휴머니즘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저자 모리스 메를로 - 퐁티는 서문에서 ‘자유주의 원리의 가면을 쓴 민주주의 사회야말로 술책과 폭력, 선전, 그리고 원칙 없는 정치 현실주의를 사실상 국제정치 혹은 식민지 정치에서 실제로 구사하고 있으며 이것은 국내 정치에서도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나 팔레스타인에 가해지는 군사적 억압과, 중동에서의 미 제국의 발호를 정당화하는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는 혁명과 폭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한다.

마르크스는 일반적으로 폭력 전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폭력을 허용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혁명적 폭력’은 ‘야만적 폭력’을 ‘인간적 폭력’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스탈린의 1937년 모스크바 대숙청은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때의 폭력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전 세계는 단지 정치적 반대파를 처형하는 행위에서 혁명의 후퇴, 변질을 경험하게 된다.

성공적인 정치제도를 통한 혁명과 폭력의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테러, 실업, 노조 등 난무한 폭력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인간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에 비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현실적이고 정직하다.

비록 현재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어렵겠지만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본질적인 접근을 했다는 데에서 충분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전 세계가 휴머니즘이라는 포장지에 눈이 멀어 ‘테러시대’의 본질을 읽지 못하는 현 시대에 이 책의 존재가 시사하는 바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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