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드보르 서거 10주기. 드보르가 350명을 위한 세계화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드보르는 서유럽의 1960년대 이후의 지식인으로서 보드리야르, 르페브르 등과 교분이 있던 프랑스의 실천적인 활동가였다. 그가 이끌었던 상황주의운동은 1968년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 치고 1994년 자기 심장에 권총을 대고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세계는 드보르가 예언했던 대로 신자유주의라는 표상으로 날조되기 시작하였고 지구적으로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세상은 8대 2의 사회가 아니라 9대 1의 사회로 치달으면서 지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상대적인 빈곤감과 박탈감은 커져만가고 있다.

드보르가 1967년에 나온 자기의 주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이야기한 키워드는 ‘스펙타클’과 ‘상황의 구축’이다. MTV를 보고 길거리에서 옥외전광판을 보며 백화점의 윈도우에 진열된 옷, 마트에 쌓인 상품들, 메가박스 등의 영화관, 텔레비젼에 나온 가수들의 춤 등 이런 것들이 스펙타클일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드보르가 말하는 ‘스펙타클’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두고 우리가 스펙타클이라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드보르가 말하는 스펙타클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필자는 <꽃피는 봄이 오면>을 구로CGV에서 구경한 적이 있다. 번호표를 뽑고 나서 티켓을 사고 음료수를 사려고 했더니 캔은 안되고 컵 음료수는 된다는 것이었다. 캔 음료수가 엎질러지지 않고 더 안전할 것 같은데 가게하고 무슨 비밀협약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입구에서 상냥한 아가씨들이 해주는 인사를 받으며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상영 몇 분전 무슨 상품을 파는지 스크린 앞에서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 후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번호표를 뽑고 영화 한 편을 보는 전 과정이 기가 막히게 척척 잘 돌아가고 영화관람료 몇 천원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나 자체’가 소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 내가 영화관람료를 낸 것이 아니라 상업주의 시스템이 나로 하여금 영화관람료를 지불하게 만들고 번호표-티켓-음료수-영화관 입구-그리고 안-상영이라는 전 과정이 돈을 소비하게 만드는 공정처럼 느껴졌다.

포드시스템의 공정을 보여주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지나면서 상품이 만들어지듯이 그 전 과정이 필자에게는 바로 그 컨베이어벨트를 닮은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드로브가 말하는 스펙타클은 간단하게 말하면 비밀을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과정들을 아무런 저항감없이 통과하며 영화관 안의 이벤트나 행사같은, 소위 우리가 ‘스펙타클’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현혹당하기 일쑤이다. 드보르는 우리 사회가 그러한 비밀 위에 구축되어 있다고 말하고 세계의 날조(捏造)화를 폭로해야 한다고 말한다.

드보르는 ‘스펙타클담론’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결국 ‘새빨간 거짓말’이란 뜻이다. 우리가 세계화를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그것이 350명을 위한 그들만의 세계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빨간 거짓말을 아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화만 날조된 스펙타클적인 담론인 것은 아니다. 최근의 이라크침공, 테러, 석유값 인상 등의 문제 배후에는 에너지와 자원의 확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비밀처럼 숨어있는 것이다.

닉슨이 “우리는 인접국가들에 대해 결코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세계에 새로운 생활 양식을 제공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세계를 날조했듯이 부시 또한 그 뒤를 이어 스펙타클적인 담론-테러-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드보르에 따르면 스펙타클사회란 상품이 사회적 삶을 총체적으로 점령하기에 이른 사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사실은 국가와 자본이 한 몸이 되어 화려한 스펙타클을 연출하고 그 스펙타클적인 외양 속에서 노동중독증사회,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박탈감 등을 은폐시키는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드보르는 비밀이 지배하는 이러한 스펙타클사회에 저항하는 전략으로서 ‘상황구축론’을 제시한다. 스펙타클이란 단어와 유사한 스펙테이터(spectator)가 이러한 스펙타클한 사회에 수동적으로 말려들어가 구경만하고 소비되는 사람이라면 상황구축론이 제시하는 전략은 말하자면, 무엇보다 이 날조된 세계에 대한 ‘참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 각자 탤런트 뒷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주연배우로 만들어가는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창조과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드보르 사후 10년은 ‘세계화’라는 스펙터클적인 담론이 은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상황’에 대한 점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글을 쓴 이득재씨는 대구가톨릭대 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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