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맞은 지 4년이 지난 2004년 한국 사회에서는 다양한 변화의 기류가 급속하게 흘러넘치고 있다. 그 기류가 너무도 급박하여 변화의 추이만을 좇을 뿐 어떠한 기류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혼돈스러웠던 한국의 변화만큼이나 따갑게도 쬐어 오던 땡볕이 점차 수그러지고 있는 9월, 각 계간지에서는 그간 각 ‘영역’에서 산발하였던 기류에 대한 평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올 한해는 정지권의 변화가 그 어떤 영역보다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보여 진다. 4․15총선과 대통령 탄핵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와 국민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 『역사비평』에서는 올해 있었던 정치권의 새로운 기류를 들여다보고 사춘기마냥 혼란스러운 한국 정치권의 정체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4․15총선까지 한국의 의회정치사는 극우반공주의자들과 수구 냉전 세력자들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간간히 진보세력들의 움직임이 보이긴 했으나 수구세력들의 억압과 정치 미성숙으로 인해 큰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이내 소진되고 말았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민주노동당은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글에서 민주노동당의 (이하 민노당)의 진보정치 가능성을 탐색한다. 민노당의 원내 진출은 한국 의회정치사에 하나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서 교수는 민노당이 진보정당으로 성장하기 위해 이념정당과 정책정당으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또한 과거 진보정당을 꿈꾸었던 대부분의 정당들이 정당다운 모습을 이루지 못한 채  천막 살이나 판자 집 생활과 다름없는 룸펜정당으로 전락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민노당과 같은 정당이 진보정당으로서 올바른 방향을 보여준다면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또한 지금과는 다른 개혁의 고삐를 다시 한번 다잡아 보아야 할 것이다. 『창작과 비평』에서는 노동, 농업, 여성 등에서 그 고삐를 추켜세우고자 한다. 각 운동영역의 상황을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변화된 오늘의 조건 속에서 새롭게 모색해야할 돌파구들을 예시해주고 있다.

 노동운동 영역에서는 1987년 6월 항쟁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들과 작금에 이르는 노동체제를 분석하며 ‘너무나 더딘 산별 노조건설’로 인해 87년 노동체제라는 긴 터널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농민운동 영역에서는 WTO쌀 협상과 관련 한국의 미래 농업정책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보였다. 이밖에 여성운동 영역과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투성이 지구’ 또한 주목할만한 하다  

『역사비평』, 『창작과 비평』이 정치와 시민운동과 같은 거대 담론을 논의 하였다면 『문화/과학』은 일상에서 피부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공간’영역에 대한 논의를 내보인다. 『문화/과학』가을호에서는 특집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공간’을 주제로 6장에 걸쳐 공간영역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담론에 따르면 공간은 물리적 속성이며 동시에 사회적 속성을 지닌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고,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공간을 어떻게 변용시키는가는 정체성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중 강내희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서울의 도시공간과 시간의 켜」를 주목할만하다. 강 교수에 의하면 근대적 공간 정체성은 도로의 직선화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생태의 자연스러운 몸짓에 의한 꾸불꾸불한 길이 인위적인 정복의 개발로 직선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청계천 복원사업, 뉴 타운 건설, (지하)철도역사 상가화, 지상복합건설 등 오늘 도시에 벌어지고 있는 정책들은 직선화에 의한 속도전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 교수는 ‘시간의 가속화만 능사는 아니다. 시간의 질감은 가속화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켜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시간의 지형에 다양한 굴곡이 만들어 질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급속한 성장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조금씩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무턱대고 가속만을 강조해서는 위험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균열을 가다듬고 미래를 향한 고삐를 다시 한번 당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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