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훈이랑 대한이 선생님 집에 갈래?”

그러자 아이들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좋다고 했다. 요셉이와 사라랑 놀 것이 신났기 때문이다. 함께 <코신안집>에서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빨리 집으로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차에 태우자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네 아이들은 뭐가 신이 났는지 야단법석이었다.

아파트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자 “엄마! 신호가 파란색이야, 빨리빨리!” 아들 녀석이 재촉을 해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뛰어간 애들은 노느라고 밤 12시가 되어도 잠들 줄을 몰랐다. 네 아이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 고것들 친남매들 같다고 생각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긴 속 눈썹, 예쁘게 생긴 자연산 쌍꺼풀에 나이도 4살, 8살, 9살, 11살이니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언뜻 보면 닮은꼴로 보이는 이 아이들은 아빠의 나라가 다르다. 성훈이의 아빠는 방글라데시, 대한이 아빠는 스리랑카, 나의 딸과 아들의 아빠이자 내 남편은 파키스탄에서 왔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하며 친구들과 놀고만 싶어 하는 아이들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혼혈아’들이다. 혼혈에 대한 말뜻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피가 섞였다? 그 단어에는 ‘순수성’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피의 순수성’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기를 만드는 것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피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이고, 또 생물시간에 배운 것을 활용해보자면 혈액형의 조합은 가능하겠다. 혈액형의 조합으로 설명하자면 모든 인간은 다 혼혈인이지 않을까?

사실 그렇다면 혼인종이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종의 가름을 무엇으로 기준을 삼는가에 따라서 인종을 세분하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개인이란 생각이 든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날 탓할지라도 말이다. 이 땅에서 혼혈이 문제가 된 것은 그 의미가 전제하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양공주라 호명했던 여성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이 사회가 비겁하게 수용하지 못해서 생긴 어두운 이미지 말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이들을 향해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또한 그 아이를 어떤 환경에서든지 열 달을 품어 배 아파 낳은 여성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다. 한 생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나름의 희생과 고통 가운데서 치러낸 일이기 때문이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호주제처럼 남성의 혈통을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가부장적 사고일 뿐이다.

이념도, 피부색도 잣대가 될 수 없는 '한국 아이들' 세계

역사에서 김수로왕이 인도공주와 결혼했다고 하자, 그 후손은 책 한권을 멋지게 써냈다. 책에서 그 공주는 김씨성과 허씨성을 가진 후손을 낳은 모태가 된다. 그리고 저 일본 땅에 까지 그 후손을 퍼뜨린다. 그렇다면 이 땅의 김씨와 허씨 후손에게 피의 순수성은 보장되는가? 이래서 단일민족의 신화는 신화일 뿐 현실이 아닌 게 된다.

지금 시대는 이주(migrant)의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한 장소에 머물러 국경을 울타리 삼아 안주하며 살아 갈수 없는 세기 말이다. 지구화가 이를 부추기고 있음을 우린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대판 유목민들이 세계도처로 흩어져 자신들의 삶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이 땅으로 이주하는 사람들 속에 여성과 남성이 있고, 그들과 우리가 만나지는 그 지점에서 사랑이 싹트고 함께 가정을 만들어 간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나와 남편은 사라를 낳고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요셉이를 낳고는 또 얼마나 많은 웃음으로 즐거운 생활을 했는지 모른다. 우리처럼 많은 국제결혼 가정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부모 됨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첫 아이 사라를 학교에 입학시키고 나서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어 자주 학급 일을 돕는 다는 핑계로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외모 때문에 눈에 띄는 아이는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물론 외국인 학교로 보내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한국어가 더 익숙했고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싫다고 하였다.

또한 사업을 오랫동안 하면서 한국에 살고 싶은 생각이 완전히 든 남편은 결국 귀화시험을 치르고 한국인이 되어서, 아이들은 서류상으로 완벽한 한국국적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아이들은 사람들이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물을 때 마다 “한국사람 인데요?”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으로 가지고 있는 아이, 동네에서 인기가 많아 친구가 많은 아이를 굳이 다른 곳에서 교육을 시킬 필요성이 없었다.

한번은 뉴스추적에서 혼혈의 문제를 다룬다면서 취재를 집과 학교로 온 적이 있다. 기자가 사라의 남자 짝꿍에게 물었다. “사라가 다른 아이랑 다른 점이 뭐라고 생각하니?” 짝꿍이 말했다. “다른 여자애는 두 갈래로 머리를 묶었는데, 사라는 한 갈래로 머리를 묶었어요.” 촬영 후 돌아 간 기자는 그 장면을 내보내지 않았다. 혼혈의 이야기를 문제(차이 또는 차별) 중심으로 보려던 의도와 맞지 않아서이다.

혼혈의 이야기를 배제와 소외의 구도로 보기 시작하면 불쌍한 혼혈아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고착화 될 뿐이다. 이것은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표상이며, 사회적 편견일 뿐이다. 아이들은 차이를 잘 모른다. 차이를 가르치는 것은 어른들, 특히 그 부모들이다.

<코시안집>(*코시안의 의미 : Korean과 Asian의 합성어)에 자원봉사 한다고 온 사람이 대한이를 보고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기, 너 어느 나라 애니?”

“저요? 한국사람인데요!”

이 글을 쓴 정혜실씨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부설기관 코시안집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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