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 1시, 새벽을 향해 치닫는 야심한 시각. 그제서야 공중파 한 채널에선 낯선 프로그램 하나가 방영되기 시작한다. 타 방송사에서는 더빙된 유명 상업영화가 방송되고 있는 심야 시간대, 채널을 돌리다 문득 지나치게 되는 ‘독립영화관’이 바로 그것이다. 누가 보랴 싶지만 게시판에 들어가면 이것저것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늦은 시간 낯설게, 또 고독하게 보여주기 작업을 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상업영화의 홍수 속에서 독립영화, 나아가 예술영화들의 지난한 홀로서기 작업을 보여주는 영화계의 축소판이랄 수도 있겠다. 

 가난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독립·예술영화계에 요즘 최대 화두는 바로 ‘마이너리티쿼터제’다. 지난달 문화관광부 소속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내놓은 이 안건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일수 중 20일 정도를 축소하고 대신 예술영화의 의무상영일수를 늘린다는 것을 요지로 하고 있다. 

헐리웃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항해 문화주권을 지키고 문화다양성을 확보하자는 측면에서 그 당위성을 인정받았던 스크린 쿼터제는 현재, 헐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수사를 가진 흥행 영화의 국내 시장 독점으로 인해 처음의 정세를 내부적으로 답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초 다양한 영화상영에 대한 기대를 모았던 멀티플렉스도 같은 영화의 개봉 스크린 수만 늘림으로써 오히려 독주에 힘을 보탰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들을 육성하기 위한 마이너리티 쿼터제는 사회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에서는 지난 8월 24일 성명서를 발표해서 ‘정부의 이러한 제도는 스크린쿼터 축소를 관철시키기 위한 예비적이고 단계적 술수에 불과하다’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조희문 영화평론가도 마이너리티 쿼터제가 ‘의무상영일 때문에 일반영화는 줄이고, 흥행이 되지 않는 영화는 억지로 상영함으로써 영화사와 극장 모두 공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며 마이너리티쿼터제가 가지는 불안요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편 그동안 고질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문제점에 대해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부분도 있다. 사실상 꾸준히 마이너리티 쿼터에 대한 논의가 있긴 했지만 이르면 내년부터 발효되는 정책적 현안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논란이 불거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목할만한 것은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일단 다양한 영화상영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논의 자체에는 환영하고 있는 분위기라는 점이다. 그것이 마이너리티 쿼터를 통해서든, 예술영화 전용극장의 확대·지원을 통해서든 간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양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는 영화계 이면에 대한 반성과 각성에서 시작된 마이너리티 영화들의 활성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점차 공론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기존의 스크린 쿼터제 사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던 단체들이 지금에 와서는 세분화되고 다양하게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문화 다양성의 영역에 관해 논란이 일었던 다음의 사례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화사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는 지난달 한 영화잡지를 통해 ‘스크린쿼터와 마이너리티 쿼터는 아예 다른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스크린 쿼터를 이야기 할 때 문화 다양성이라는 것은 자국 영화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민족과 문화 간의 다양성의 의미로 제한되어야 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이에 인디포럼 김노경 프로그래머는 ‘스크린 쿼터가 한국영화의 생존을 위한 쿼터일 뿐이라면 그 기저에 남는 것은 공정거래라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지극히 충실한 제한된 정당성뿐’이라고 반박하며 기존의 스크린쿼터 유지 입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했다. 국제적 차원의 제한된 의미의 문화 다양성은 궁극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내부의 다양성 논의에 대한 선례는 프랑스 영화계를 통해 얻을 수 있다. 2002년 현재, 파리소재 극장은 전체의 40% 가까이가 예술실험영화극장으로 선정되어 있고 60%가 구 대학가에 자리 잡고 있다. 멀티플렉스의 출현 이후에는 고전영화, 작가 회고전, 다큐멘터리, 제3세계 영화, 프랑스 독립 등 각 영화관마다 뚜렷한 구분이 이루어져서 차별화된 전략으로 다양성을 꾀하고 있다.

시의 재정지원과 활성화된 관람이 그 배경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프랑스는 영화를 산업이자 문화로 파악하고 있지만 우리는 산업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한 말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일년에 한번씩 열리는 영화제 기간동안 직접 찾아가야 흔치않은 영화를 볼 수 있고 그마저도 영화제가 끝나면 다시 볼 기회가 희박한 우리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다.

2001년 파리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다양성 선언’ 이 있은 지 3년이 지났다. 문화 다양성이 곧 그 나라의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취지에 입각한 각계 예술가들의 그 날 선언은 어쩌면 독립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던 우리나라의 한 젊은이에게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한 사람의 독립영화감독에 대한 꿈을 일궈 내기 위해서는, 우리 영화계 내부에서도 다양성에 관한 선언문이 실제로 발효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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