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에는 일본의 공무원들이 서울시의 시내버스 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방문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 공무원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 그들의 사진 아래, 기자는 이들의 진정한 방문목적을 말해주었는데, 그 목적이란 ‘거대한 사업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지’였다고 한다. 아마 이 기사를 읽으면서 시청에 계신 누군가는 매우 자랑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일단 밀어붙이고 나면 혼란은 며칠 만에 잠잠해진다’는 게 이명박 서울시장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데, 전문가들이 표현하듯 그의 이런 ‘불도저식 개발’ 정책 때문에 천만 시민이 사는 서울의 몸은 하루아침에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고 있다. 서울의 영혼은 이미 봉헌되어 하나님 나라에 가있으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도시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공간에 난도질을 해대지만, 무엇보다 도시는 몇 명의 정책개발자나 공직자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그곳을 걷고 그곳을 느끼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도시에서 걷기」(Walking in the City)라는 글에서 고층 빌딩에 올라가 맨하탄 시내를 내려다보던 경험을 쓰면서 도시의 정책담당자들은 언제나 이렇게 높은 곳에서 ‘저 마을을 없애고 길을 뚫고, 저곳에다는 새 마을을 만들자’는 식의 계획을 세운다고 지적한다.

자신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높은 곳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시를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지만, 실상 도시는 빌딩 숲에 가려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도시가 자기 것이라는 점을 망각한지 오래다.

도시는 시민들이 한시적으로 맡긴 공무원들에 의해 변해가고, 시민들은 그 불편한 공간들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애써 적응시킬 뿐이다. 자기가 사는 공간으로부터 소외되어, 그 어느 곳에도 시민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남은 것은 오직 시청을 거쳐가는 시장들의 ‘성과물’ 뿐.

박정희에서 이명박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개발 제일주의의 ‘성과물’은 어디에 봉사해오고 있는가? 상류층과 중산층의 기득권에 봉사한다. 70년대 서울에 생긴 달동네들과 88 올림픽 때 그들을 강제 이주시킨 자리에 세워진 아파트들은 언제나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을 분리시켜 왔으며, 이제 21세기에 진행되는 15개 가량의 ‘뉴타운’들은 서민들이 쫓겨나고 중산층들이 이주해오는 새로운 공간이 될 전망이다. 달동네들과 빈민들이 사라지지만, 우리 앞에 생겨나는 아파트들을 보면서 우리는 서울이 점점 ‘발전한다’고, ‘깨끗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갈 곳 없는 빈민들이 저항하면 그곳에는 용역깡패들이 들어가고, 달동네에는 수도가 끊겨 아이들이 목욕도 못하며, 집을 잃은 가장이 자살을 하고 있을 때, 서울은 점점 깨끗해지고 고층아파트들은 날마다 하늘을 가린다. 개발은 언제나 없는 자보다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듯 보인다.

결국 서울은 시장님과 자본의 욕망이 투사되는 공간이다

개발 제일, 효율 지상, 성과 최대의 성삼위일체는 서울시장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이미 우리 시대는 이 기운에 ‘봉헌’되어 있다. 학생들은 무조건 내신과 수능점수를 올려야 되고, 노동자들은 무조건 이번 달 실적을 배가시켜야 하고, 경찰들은 무조건 범죄율을 내려야 한다. 어떻게든 성공만 해놓으면 다 잘 된다는 식의 논리가 서울과 한국 전역에 퍼져 있으며,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군사문화가 퍼뜨린 이 막가파식 문화에 우리는 너도나도 잘 길들여져 있다.

신자유주의는 효율/성과주의와 친형제간이고, 이런 공기를 마시면서 우리들은 결국 공익도, 연대도, 정의도 필요 없이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챙기며 산다. 삶은 전쟁이 되고, 전쟁이 삶이 된다. 전쟁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목숨이지, 아름다움도 유머도 여유도 아니다.

서울이라는 전쟁터가 아름다움도 유머도 여유도 없이 오직 속도와 밀도만 있는 공간으로 변하는 것은, 그런 공간에서 비로소 우리가 잘 싸우며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알 없는 빈민 노숙병사들은 이 전시상황에서는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죽거나 나쁘거나.

결국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에 투사되는 것은 시장님의 욕망과 자본의 욕망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가 좀 더 효율적으로 잘 달리라고 시장님은 30분내 환승하면 돈을 안내도 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저 열심히만 사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

우리 삶을 휘감고 있는 개발논리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공간, 우리 시간을 찾기 위한 방법은 다른 거 없다. 쉬거나 늦추거나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자. 끝없는 적금대신, 조금 벌어 조금 쓰고, 대신 우리 시간과 공간을 우리가 확보하자. 시장님이 개발과 효율도로를 1등으로 달려가기만 할 때, 치마입고 나가서 그를 확 밀쳐내 버리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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