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울시는 유래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청계천 개발부터 시작된 이명박 시장의 개발주의 정책은 임기 초기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어떠한 반대급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숨가쁘게 달리고 있다. 개발만능 주의의 뒤편에 가려져 있는 서울시 개발의 숨겨진 이면을 살펴보고 포화상태에 이른 서울시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문화란 삶의 총체적 상황으로서 어떤 상태에 머물지 않으며 끈임없이 살아움직이는 것이다.(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 『문화도시 서울 어떻게 만들것인가,』 시지락, 2002)

 문화란 어떤 특별한 어떤 것이기에 앞서 삶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적 삶이란 이런 총체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닌 가까운 삶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또한 공간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시는 삶과 문화가 만나는 거대한 집적체이다. 어떤 의미에서 도시는 삶의 전부이고 우리가 지니는 문화의 전체이다. 

나름대로 공간전문가(?) ‘개발만능주’의 시절의 건설회사 사장이라는 개인 이명박의 특수한 체험은 현재 행정가로서의 이명박을 형성하는 중요한 구심이다. 

'생물' 청계천, 멸종 위기에 처하다

 이명박 시장이 서울시장에 취임 한 이후 서울은 급격한(!) 공간의 변화를 시작했다. 그 변화는 천만 서울 시민의 삶의 변화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는 ‘개발과 파괴’, ‘복원과 복개’, ‘그린과 파시즘’ 등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단어들이 난무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의 시작은 이 변화의 공정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방식이었다는 것이었다.

존의 것을 밀어내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이명박 시장의 개발정책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청계천이, 도심부가, 아스탈트 중앙이 그린벨트 지역이 이명박 시장과 만나 느닺없는(!) 변화와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서울은 왕권에 의해 600년 전에 세워진 도시이고 2000년 이상 사람들이 손때를 묻혀온 공간이다. 그러나  서울만의 고유한 장소성과 역사성은 그간 지속적인 파괴를 경험해왔다. ‘효율과 속도’ 이외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오늘도 서울의 지도를 바꾸고 있다. 청계천은 ‘효율과 속도’를 추구하는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자연적인 물길을 인위적로 메우고 그 위에 흉물스런 고가를 얻어 ‘효율과 속도’를 극대화 해낸 공간이었다. 그러나 ‘자연과 복원’을 내건 이명박식 청계천 개발은 ‘이명박 개인의 치적을 위한 거대한 모험’이었으며 나아가 ‘서울파괴계획’이었음이 밝혀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청계천은 서울에서도 가장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곳이다. 청계천에는 역동성과 역사가 공존하며, 생존과 풍물이 어우러진다. 푸근한 삶의 풍광들이 넘쳐나고 제각각의 어우러짐은 쾌쾌하지만 소중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청계천은 여전히 과거와의 대화가 진행중인 ‘생물’이다. 

그러나 이명박식 개발은 이 공간의 장소성에 대한 막무가내식 혐오와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자연하천’인 청계천을 국적불명의 ‘조경하천’으로 복원고 고층 건물들을 빼곡히 채운다는 것이 이명박식 개발의 전부이다. 민중의 삶이 아우성치던 소통의 공간을 초국적 금융자본들의 냉혹한 투기장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 이명박이 생각하는 ‘삶의 질’이다. 

서울 망하는 길, '강북의 강남화'

이명박 시장은 자신이 밀어붙이고 있는 개발을 합리화하시키기 위해, 서울을 살아가는 도시민의 욕망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슬로건을 선보였다. ‘강북의 강남화’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보다 정확하게 잡아낸 문장이 더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누가 뭐래도 도시를 살아가는 행위는 자본의 지속적인 압박에 초연해야 가능한 삶이다.

도시의 거리 한 걸음 한 걸음은 소비를 향하는 길이다. 이 간략한 흐름이 모든 도시인의 일상을 짓누르는 무서운 이데올로기이다. ‘강남’이란 단어는 단순히 공간을 지칭하는 물리적 이름이 아니라 도시인의 보편적 욕망을 상징하는 명사이다. 이것은 ‘잘 살아보자’는 고전적 슬로건의 ‘2004년 버전’으로 보인다.

‘강북의 강남화’라는 사회적 지위를 향한 욕망은 극단적 계급 편향을 이룬다. 이것은 그냥 잘 사는 것을 넘어 특정한 계급처럼 살아가라는 강권이다. 강남의 삶이 강북의 삶보다 특별히 나을 이유가 없으며 모든 삶의 풍경을 자본의 크기로 논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운용해가는 시장이 모든 것을 자본의 크기로 제단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천박한 자본주의 법칙에 의해 지배당하는 우리 사회의 현재적 모습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다. ‘서울’을 살.아.내.야.하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이명박 시장에 의한 서울의 훼손은 물론 전혀 생경한 풍경은 아니다. 서울은 근대화 과정속에서 끈임없이 훼손되어왔다. 여러차례 지적된 바 이 나라에서 도시를 만들어온 힘은 오직 ‘개발독재의 힘’뿐이었다.

이명박식 파괴 더 이상 안된다

그러나 이명박 시장은 구시대적 패러다임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재현한다. 누구나 보다 문화적이고 생태적인 도시민을 꿈꾼다. 이를 위한 첫번째 과제는 공간적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철저한 서울 파괴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공간을 파괴하기 위한 야만과 폭력을 교묘히 위장하는 ‘파시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명박이라는 놀랍지만 익숙한 아이콘의 등장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개발과 파괴’를 넘어 대안적 도시를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안적 삶이란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어온 삶 속에서 문화적이고 생태적인 맥락들을 짚어내고 길을 열고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이명박식 파괴는 더이상 안된다.  

이 글을 쓴 완군씨(ssamwan@jinbo.net)는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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