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민병직씨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우문일지 모르겠지만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베티’란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사진인가 그림인가?

물론 이 작품은 캔버스에 오일이라는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림이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신문을 통해 보고 있는 이 그림은 또한 사진이기도 하다. 사진을 보고 거의 사진처럼 그려낸 그림이지만  만약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었다면 그 작업은 물론 사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사진을 닮은 그림과 그림을 찍은 사진이라는 이 애매한 차이는 리히터의 관심이자 현대 회화의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왜냐면 사진이라는 기계적 눈들의 등장과 그런 기계의 눈들이 재현해내는 수많은 이미지들의 과잉 속에서 종종 ‘회화의 죽음’이라는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화는 과연 죽었는가? 게르하르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회화의 사망선고에 대한 것들, 회화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자 그 대답이라 할 수 있다. 이 작업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본적인 문맥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77년 자신의 딸인 베티를 스냅 사진으로 찍은 뒤에 그 사진을 1988년에 다시 그린 것이다. 그리고 1991년에는 다시 카메라로 촬영을 하여 사진작업으로 변형시켰다. 마치 우리가 보는 것이 그림을 찍은 인쇄된 사진 이미지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1991년의 사진작업과 그다지 다른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을 한 작가의 의도 혹은 관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리히터는 우선 사진적인 이미지와 닮으면서도 다른 그림을 ‘그림으로써’ 회화의 어떤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진적 그림(The photographic painting)이라는 작가 특유의 기법을 고안해 냈다. 사진적 그림은 사진을 보고 거의 사진처럼 그린 것이지만 물감이 마르기 전에 마른 평붓들로 형상의 외곽선을 문질러서 흐릿해진 부분들을 만듦으로써 사진과 다른 이미지를 갖게 한 그림이다.

마치 사진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객관성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회화만의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사진적 재현의 확실성에 대한 문제제기인 동시에 화가의 손노동을 통해 아직도 버젓이 존재할 수 있는 회화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리히터의 의도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다시 사진작업으로 재복제함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현대의 이미지 상황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하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사진적 이미지, 곧 기계의 눈으로 만들어낸 복제된 이미지들과 함께 공존하면서도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회화의 현재형에 대한 고집스러운 문제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면에서 그림 속에서 어두운 배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딸의 모습은 사진적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만(상체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만) 미지의 심원한 곳(가장 기본적인 회화라 할 수 있는 모노크롬 회화)을 애써 바라보고 있는데, 이런 그림의 내용이 마치 지금의 상황 속에서 작가의 회화에 대한 관심을 보는 것만 같아 더욱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글을 쓴 민병직씨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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