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자 연예인의 누드 모바일 서비스는 예삿일이 되었다.

누구나 접속해서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그녀의 누드 이미지를 소비하고 잠시나마 향락을 전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꾸 누드를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방법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쾌락을 추구해서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쾌락은 무엇인가. 기원전 에피쿠로스는 답한 바 있다. 그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을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영혼이 감각의 주요한 원인으로 보고 또 몸은 감각의 원인을 영혼에 제공한 후, 자신도 우연적 속성(감각)의 몫을 영혼으로부터 얻는다고 본다.

감각에 의해 우주의 모든 물체(감각되는 모든 대상)은 인간에게 인식된다.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를 평가할 기준은 쾌락 또는 고통의 직접적인 느낌이다. 즉 쾌락은 좋은 것이고 고통은 나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장 큰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1)사람들이 어떤 영원한 비극을 항상 기대하고 마음속에 그려보거나, 죽을 때 감각이 없어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2)사람들이 분명한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는 마음 상태에 의해서 그러한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의 고통에 한계를 그어주지 못한다면, 판단에 의해서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 때와 같거나 아니면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평안은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보편적이고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계속 기억함을 뜻한다.

그는 다시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可死性)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 감각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쾌락의 부재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에는 쾌락을 필요로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쾌락이 행복한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쾌락을 우리에게 타고난 첫 번째 선이라고 인식하고, 선택하고 기피하는 모든 행동은 쾌락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고통들이 쾌락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고통을 참으면 더 큰 쾌락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과 쾌락을 비교함으로써 이득과 해를 판단해야 한다. 쾌락의 지속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고통을 양산시킨다. 역으로 결핍은 쾌락의 도래를 기다리게 하여 흥분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결핍과 고통을 사랑해야 한다. 즉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자유와 사려깊음이다.

이 글을 쓴 송승환씨(poetika@naver.com)는 학술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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