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묵적으로 종교적 강요를 받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종교 자유의 의미가 '종교로부터'로 바뀌고 있다. 종교 강요를 받는 배경을 살펴보고 진정한 종교적 자유의 의미를 알아보자(기독교 안에는 개신교와 카톨릭이 존재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보통 개신교에 제한을 두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기사에는 중대신문 기획부는 기독교의 의미를 역시 개신교에 한정한다).             <편집자주>

성스러움의 금줄이 드리워진 절대 미지의 영역인 종교를 감히 인간학적이고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겠다는 발칙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종교적 부자유의 문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내 지레짐작이지만, 내 주변의 많은 학문적 동료들과 선배들은 처음에는 종교에 대한 관심에서 종교학을 시작한다. 그러나 공부와 연구라는 지방질이 신체에 일정량 축적되고 난 후부터는 종교와 종교학의 신진대사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종교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의 취업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재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특정 종교로 개종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 한번쯤 작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전체 대학의 약 삼분의 일 정도가 기독교계 종립대학이고, 둘째 종교학을 가르치는 대학의 거의 대부분이 종립대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립대학은 자기 종교의 신자를 자기 대학의 교수로 삼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채용공고에 명문화한다. 지원자격에는 어김없이 “해당분야 박사학위 소지자와 기독교인(세례교인)을 원칙으로 하며…”라는 구절이 삽입돼 있다.

특정 종교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자유, 그것도 '종교자유'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학문적 권력구조에 편입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조차도 암암리에 개종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종교와 종교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정신분열증이 시작된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교육의 자유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세워진 종립학교가 역으로 사람들에게 종교적 부자유의 상황을 겪게 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유의 깃발은 항상 부자유의 존재를 증언할 뿐인 듯하다. 다른 영역에서도 문제는 비슷하다.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치, 장사, 사업, 유학생활의 원만한 성공을 위한 처세술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에는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조항이, 헌법 제20조에는 “①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가질 뿐만 아니라 ‘종교로부터의 자유’까지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나의 종교 있음으로 인해 내가 차별받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인의 종교로 인해 나의 종교 없음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가 ‘종교선택의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로부터의 자유’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선택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종교선교의 자유를 의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 종교를 교육받지 않을 자유, 종교를 선교당하지 않을 자유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는 자유라는 기득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곳곳에 잠복해 있는 부자유를 포착하고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현미경의 렌즈 같은 것이다. 문제는 항상 부자유에 있다.

종교로 인한 부자유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얼마 전에 한 고교생이 기독교계 종립학교에서 종교적인 예배활동을 거부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다 제적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 이 학생이 주장한 것은 ‘종교선택의 자유’라기보다는 ‘특정 종교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자유’, 다시 말해 ‘종교로부터의 자유’였다. 종립학교 내의 종교적 부자유를 지적하고 이에 대해서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재단측에서 ‘종교교육의 자유’를 주장하거나, 우리도 기독교인 학생만을 선발하고 싶지만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그럴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이라는 식으로 책임을 정부에게 떠넘기려고만 해서는 안된다. 논점은 종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학생의 자유와 종교를 교육하고자 하는 종립학교의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있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종교로 인한 부자유’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지형이 변한 것이다. 과거의 종교자유의 문제는 종교를 선택하고 수호할 자유의 문제였지만, 이제 우리는 종교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 즉 종교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도시의 미관을 해치며 어지럽게 늘어선 빨간 십자가들이 좀더 미학적으로 배치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지하철 한 칸을 자기 목소리로 점유한 채 예수를 외치는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거렁뱅이조차도 찬송가 테이프를 돌리고 다녀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들이 ‘종교로부터의 자유’의 작은 외침인 것이다.

이 글을 쓴 이창익씨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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