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문화지형을 더듬다 보면 지난 밀레니엄 전환기의 부산했던 분위기가 뇌리에 되살아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역사발전의 축을 담당해 왔던 ‘정치와 경제’, 그 자리에 문화가 들어설 것이라는 의견을 너나할 것 없이 앞을 다투어 내놓았었다. ‘문화’가 새밀레니엄의 세기적 화두가 될 것이라는 호들갑스러운 예견을 우리는 ‘문화의 세기’라는 말로 기억하고 있다.

새천년 벽두의 호들갑으로 자본은 문화의 부가가치에 매료된 속내를 완곡하게 드러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바라보던 자본의 기대는 생각보다 빨리 보상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문화의 세기’는 문화라는 정신영역을 ‘히트상품’으로 훌륭하게 가공해내고 있다.

자본의 문화상품화 전략은 섬세하고 정교하다.그 가운데 소비자본주의는 무엇보다 ‘문화의 민주화’라는 달콤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잉여영역’으로서 과거 특권층이 즐겼던 문화를 나눠 갖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이러한 환상을 더욱 강화시킨다.

소비자는 고급문화가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문화의 민주화라는 가상을 강렬하게 느낀다. 문화의 질적 구분을 폐기한 문화산업의 ‘크로스 오버’ 전략은 문화의 민주화라는 가상을 완벽하게 실현시킨 일등공신이다. 사실 문화의 민주화라는 환상의 뒤켠에는 ‘고급문화’에 대한 은근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산업은 문화의 민주화 환상과 함께 구별짓기 전략을 구사한다. ‘오직 나만이 즐길수 있다는 자부심을 통해 스스로를 개성적 존재로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문화산업이 소비자에게서 노리는 핵심이다.

이 같은 구별짓기 전략은 소비자의 ‘고급취향’을 부추기는 가운데 절정에 이른다. ‘상위 1%를 위한 차’와 나란히 ‘상위 1%를 위한 문화상품’이 생산되며, 소비자는 고급취향과 신분적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흔쾌히 소비에 나선다. ‘상위 1%를 위한’이라는 구호가 대중매체를 활보한 지 오래다.

이것이 ‘사회적 위화감을 야기 한다’는 논리는 자본의 위세 앞에서 미약하기만 하다. 문화는 국부의 창출을 위해서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중의 사물화된 심리구조가 자본의 논리를 떠받치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급문화상품의 소비는 그들의 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소비능력을 키우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 된다. 문화의 민주화라는 허상과 함께 소비자는 계층상승에 대한 기대를 가슴에 깊숙이 품는다. 이런 심리구조를 문화산업은 집요하게 이용한다.

문화상품의 판매를 위해 소비자본주의는 ‘차와 아파트’에서 찾았던 정체성을 문화상품에서 찾도록 소비자의 ‘허위욕구’를 자극한다. 현실적 필요성과는 무관하지만, 문화상품의 소비에서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만족을 무의식 속까지 깊숙이 박아 넣는다. 이렇게 보면 ‘대중은 분명 각자가 소비하는 문화상품에서 자신의 영혼을 찾고 있다’는 말이 허사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문화의 세기’에 문화의 의미는 소비자의 신분과 원자화된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의 세기’는 ‘문화소비의 세기’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문화소비의 세기는 역사발전을 일구어 낼 수 있는 문화의 가능성을 질식시키고 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의 위력 앞에 문화에서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어느 때보다 지난한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쓴 오성균씨는 문과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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