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우리 사회 내에서 청소년이 처한 입장과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이 몇 가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 몇몇 청소년들이 주도해서 인터넷을 통해 전개했던 ‘두발 제한 반대 서명 운동’이 전국 10만여명의 청소년들의 서명을 받아내면서 일선 학교의 두발 제한 규정들을 변화시키는 성과를 올린 바 있었다. 

지난 대선 때에는 ‘만 18세 이상 청소년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라’며 ‘낮추자’라는 단체를 만든 청소년들이 모의선거 등 퍼포먼스를 벌이는가 싶더니 최근에는 ‘18세 선거권 낮추기 청소년 연대’가 결성되어 지난 5월 31일 17대 국회 국민청원 1호로 <선거연령하향(18세)조정에 관한 청원>을 제출한 바 있었다.

또한 얼마 전 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에게 종교 의식과 교육을 강요하지 말고 선택해서 참여할 권리를 달라며 장기간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 대광고교 3학년의 강 의석 군의 경우는 아직도 농성을 풀지 않고 있어서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이들은 왜 지금 목소리를 내기 시작 했을까? 단지 겁 없는 아이들의 철없는 주장들에 불과한 것인가? 

그동안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배경에는 청소년기는 배우고 훈육 받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이며 청소년들은 어른에 비해 미숙하고 경험과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는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청소년기와 청소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근대 산업사회에 들어와 만들어지고 고착되어 왔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온정과 관심이 확산되면서 이들을 노동과 성인의 세계로부터 격리시켜 준비와 훈육의 시기로 청소년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준비기로서의 청소년기를 살아가고 있는 미숙한 청소년들에 대해 어른들의 보호와 간섭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한 보호와 간섭의 논리는 청소년들의 자율적 선택과 자기결정, 그리고 새로운 시도의 기회를 박탈하고 실질적인 권리의 침해의 가능성을 야기 시키면서 청소년에 대한 간섭과 불간섭, ‘보호’와 ‘자율’ 사이의 갈등, 경계, 조정 등이 현시대 청소년 인권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근세 이후 인권사상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자율’적 요소가 ‘보호’적 요소를 극복하며 날로 그 범위와 세력을 진전시켜 온 과정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이는 시대사적 조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신체 생리적으로 이미 성인과 다름없는 매우 조숙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매체의 발달 및 정보화 발달로 인해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사회문화의 창출과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근대화 과정에서 조작되고 고착되어온 나약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청소년관은 이제 새롭게 규정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절대적인 ‘의존’과 ‘보호’를 요구하는 아동기와는 달리 신체 생리적으로 성장을 완료하고 사회적 자립의 문턱에 바짝 다가서 있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부당한 간섭과 보호를 받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 및 결정과 책임에 따라 자율적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이 충분히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선거권, 표현 및 종교의 자유 등 최근 높아져 가는 청소년들의 권리 주장에 적극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권리 행사 경험을 허락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들이 그토록 요구하는 권리 행사를 위한 능력과 경험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미래를 위해 현재의 권리를 유보 시킨 채 살아가는 2급 시민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율적으로 자신의 행동과 삶을 꾸려하고 책임질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쓴 최윤진씨는 문과대 청소년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