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는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다. 수십년 동안 반공이데올로기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온 국가보안법을 설명할 때 이 말은 아주 적합하게 맞아 떨어진다. 국가 기관의 자의적 해석이 남발할 수 있고, 유추해석을 충분히 보장해 왔으며, 위법성에 상관없이 형벌을 마음껏 부가해온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국 교수는 이러한 국가보안법을 가리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표현한 바 있다.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있다가 그 길을 지나는 여행객들을 잡아다가 자신의 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몸이 작으면 몸을 잡아 늘리고, 길면 그만큼 몸을 잘라 죽여버렸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국가보안법은 자본주의 독재권력의 지배논리에서 일탈하는 일체의 사상과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절대적인 척도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수 십 년 간 우경불구화의 길을 걸어 왔고, 수많은 진보적이며 양심적인 행위자들이 좌경과 불온이라는 낙인을 달고 죽거나 갇혀야 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해야했던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국가보안법은 국민들의 생각의 구조를 틀어쥔 ‘상식’으로 군림해왔다. 국가 ‘보안’이라는 그 상식은 인권과 보편적 정의와 자유가 유린되고 그러므로 국민의 안보가 위협당해도 된다는 몰상식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이탈리아에 접목시켜 현실화하고자 했던 그람시는 “복잡하고 다원화된” 현대사회를 분석하기 위해서 무엇이 자본주의의 ‘강젼인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함을 강조한바 있다. 중대한 경제적, 사회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르주아 지배를 지속시키는가. 그것은 바로 대중이 살고 있는 사회내에서의 도덕, 관습, 제도화된 규칙을 수용하는 대중의 철학에 있었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대한 대중의 동의와 그러한 헤게모니를 형성함에 있어 정통성을 부과하는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에 그람시는 주목했다.

지식인과 대중의 경계가 무참하게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헤게모니를 형성할 주체는 누구인가. 언론의 지면을 채우는 법률전문가, TV토론에서 혈전을 벌이는 교수들, 형법의 보완으로 보수 유권자들을 달래는데 여념이 없는 여권? 그러나 이보다 항상 앞서왔던, 그리고 앞서 갈 이들은 네트상의 게시판을 떠돌며 끊임없이 논쟁할 수 있는, 연좌시위를 통해 거리를 점령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다.

새로운 규칙에 대한 정통성을 만들고 공유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국가보안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수 십 년 간 죽음으로 싸워온 ‘우리’ 자신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대중적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그 한복판에 바로 ‘우리’가 있었다. 국가보안법은 대중의 이름으로, 국민의 행동으로 폐지시켜야 한다.

이 글을 쓴 이희랑 씨는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박사 4차)을 전공하고 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