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중문화 텍스트를 예술가의 고독한 작업의 결실로 간주하는 관점은 이제 상식이 된 듯하다. 19세기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한 이런 관점은 현대의 '예술인' 대중가요에도 적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조적 음악가는 고도의 심혈을 기울여 장인적 노력의 산물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피와 땀과 눈물은 많은 경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저주받은 걸작(?)창조적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고독하다.

그런데 고독한 천재의 작업이 반드시 상업적 실패로 치닫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 준비된 논리가 있다. 그것은 상업적인 압력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예술가의 진정한 승리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창조적인 예술작품은 '진정한' 대중이 인정해 준다.

무엇이든 간에 이 주장에 내재된 논리에서는 그의 고난에 찬 예술작업이 진정한 예술작품에 대한 감식력이 없는 산업 시스템 (이 산업 시스템에는 때때로 '무지한'대중이 포함된다.)과 뚜렷이 대비된다. '예술 대(對) 산업.

그렇지만 중세나 조선시대가 아닌 바에야 모든 (대중)문화는 여러 단계의 산업적 경로를 거쳐 우리의 손으로(귀로)전달된다. 그것은 일련의 기계적 과정에 의해 제작되며 상업적 유통 과정을 통해 매개된다. 따라서 시장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논리는 우리가 매일 숨쉬는 공기와도 같다. 이 말이 체제 현실을 긍정하자는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현대 '예술'의 생산이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전제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전제가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의 195년 앨범이 갖는 음악적 성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빼어난 가사가 전해주는 정취, 포크의 서정성과 결합된 완벽하게 소화된 민요적 정서는 당대의 민중가요의 실천이 '우리것'에 집착하면서도 작품상으로는 그다지 내실있는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그렇지만 논점은 이 앨범에 대한 평가다. 예술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앨범은 '우리 것' 에 대한 애착이 강화되는( 혹은 강박관념으로 변하는)'무진 새노래', 민중운동과의 조우 이후에 불법음반으로 발표한 '아!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재발견된다. 따라서 이 앨범은 전통과의 전면적인 만남을 예비하는 전주곡, 민중가요의 사회의식의 맹아를 담은 자의식으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이런 해석이 전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앨범의 가장 중요한 정서 중 하나인 소시민성과 센티멘탈리즘을 간과하거나 이후에 극복되는 것쯤으로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강에서'와 '서울의 달'의 어설퍼 보이는 감상성(感傷性), '사망부가'와 '애고, 도솔천아'의 청승맞음, '봉숭아'의 소박함은 오히려 정태춘(과 박은옥)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함이다.

이 앨범의 장점이자 미덕이(이른바 예술적 성취와는 어느 정도 동떨어진)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의 세계에서 도출해낸 '아마추어적'정서라는 점은 쉽게 간과된다. 모여있을 때는 팔을 휘두르며 민중가요를 불렀던 1980년대의 용감한 선배들이 짐에서는 혼자 정태춘이나 동물원의 센티멘탈리즘에 빠졌다면 과장일까.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앨범이 상업적인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거나,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거두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대를 살아가던(일부의)사람들의 삶의 맥락에 잘 접합될 수 있는 문화적 감수성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앨범은 이후의 작품보다 더욱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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