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북한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노래를 꼽자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들 수 있다. 김원균은 바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작곡가로서 북한 최고의 음악가이면서 북한 음악계를 대표하여 대내외적인 활동을 비중높은 인물이다.

1925년 평안남도의 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김원균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김원균은 음악공부를 의하여 원산을 비롯한 각지를 유랑하면서 철공소의 막꾼으로, 광산 막장의 인부로 힘든일을 하면서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한 김원균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환경으로 인해 제대로 졸업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일본에서 귀국한 김원균은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환영대회에서 김일성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아 김일성을 주제로 한 노래를 작곡하기로 결심하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김원균은 1950년 소련에 유학하여 음악대학을 수료하고 돌아와 작곡활동을 한다.

김원균은 작곡활동 뿐만 아니라 북한 음악계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등 행정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김원균의 이력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김원균은 1954년에는 북한 음악가 동맹 중앙위원에 오른다. 김원균이 속한 음악가 동맹은 북한 문학예술총동맹 산하의 음악인들의 단체이다. 음악가 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원균은 그 후 1961년에 북한 최고의 음악전문인 양성기관인 평양음악대학 학장에 오른다. 또 음악가 동맹 부위원장에 선출되고 조선. 몽고 친선협회 대표단장 자격으로 몽고를 방문하는 등 북한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활동하였다. 1980년에는 북한 최고의 가극단인 피바다 가극단의 총장에 오르기도 했다.

북한 가요에서 명곡으로 꼽히는 가요를 꼽자면 '조선의 별', '김일성 장군의 노래', '동지애의 오래'를 들 수 있다. 이 노래들은 북한의 3대 가요로 불리는 곡들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널리 불리는 노래가 바로 김원균이 작곡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이다. 김원균이 북한 최고 작곡가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에는 김일성의 후원이 컸는데, 김원균이 김일성의 사랑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김일성의 노래'와 '애국가'를 작곡하면서부터였다.

북한에서 음악은 "인민적인 우리식의 음악을 발전시킨다"는 방침에 따르고 있다. 음악에서 사상성과 예술성을 결합시키며,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기본전제로 한다.

김원균은 이론에도 밝아 1966년 '전투적인 혁명가요에서의 정서문제'와 1967년 '음악창작에서 시대적 요구를 관철하자!'등의 논설을 쓰기도 했다.

북한 음악계에서 김원균의 위상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원균은 북한음악계의 대표적인 요직을 두루 거친 것은 물론 북한 음악의 대표자로서 몽고를 방문하였으며, 범민족음악회에서는 북한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김원균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역시 예술인으로 이름이 높다. 김원균의 맏아들은 공훈예술가로 김원균의 대를 이어 만수대예술단의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맏딸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둘째 아들은 보석공예창작사의 미술가로, 넷째 아들은 피바다가극단에서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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