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 0일.

비가 온다. 버스에 오른다. 좀더 낮아진 플로어와 상대적으로 증가한 의자의 수가 차가 가지는 경쾌함만큼이나 새롭다. 하지만 한강대교를 빠르게 지나가는 버스안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으로 인해 머리를 감싸쥐고 만다. 빗길에서 빨리 달려서는 안된다는 것. 현재 인간의 공학기술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중의 하나가 빗길과 빙판에서의 마찰력 증대방법이다.

수십 만대의 차가 지나다니는 한강대교. 190년 미국의 타코마 해협의 다리는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진동주기가 달라져 개통 4개월만에 무너져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다. 책을 사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매장 안의 사람들을 보며 다시 악몽을 꾼다. 혹시 내가 서 있는 이 건물의 바닥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어떻게 될까. 설계를 잘못하여 위에서 춤추던 1백40여명의 사람이 고가통로와 함께 묻혀버렸던 1981년 캔사스시티의 한 호텔의 붕괴사고가 뇌리를 스친다.

기술역사학을 통해 인류의 공학발전의 과정을 다룬 '인간과 공학이야기' '인간을 생각하는 엔지니어링'은 역사상 일어났던 공학의 실패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최초의 잘못된 설계이고 다음은 시공과정의 변질문제이다. 잘못된 설계는 그 구조물이 결국 실패(붕괴되거나 부서지는)할 수 밖에 없도록 설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공학이야기'의 저자 페트로스키는 '완벽한 설계'란 없다고 단언한다. 무너지지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고장나지 않는 구조물은 있을 수 없다는 것. 현재의 모든 것들은 그 실패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완벽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 자체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공의 문제 역시 같은 이치이다. 완벽한 설계가 없는데 완벽한 시공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공포 속에서 살 수 없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건물이 언제 무너질까를 생각하며 수업을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타고 가는 자동차가 언제 바퀴가 빠지고 엔진이 내려앉을지 걱정한다면 그는 아무리 먼 길이라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보로 밖에 이동할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곧 인간을 위한, 인간의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 속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고학기술의 그러한 이상에 1백% 부합하지 못한다. 숱한 문명의 이기들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생명은 더 위협받고 있으며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이 희생되는 경우는 이미 무감각해질 정도이다. 건물이 붕괴된다거나 다리가 끊어지는 구체적 실패의 경험은 뉴스를 통해 알면 되는 것이고 현대인은 이미 더 이상 그 문제에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면 이러한 위협과 실패의 생산자가 되어버린 엔지니어들은 자유로운가.

자신있게 무책임을 피력할 수 있는 엔지니어는 도대체 누구?

'생각하는 엔지니어링'의 저자 퍼거슨이 해답을 찾고자 하는 궁극적 물음이다. 그는 자세의 문제를 강조한다. 그 자세란 인간을 생각하는, 인간에게 부과되는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엔지니어로서의 자세다. 그 자세의 기본 조건은 '마음의 눈(Mind's Eye)'을 가지는 것이다. 예술을 보는 눈과 같은 이치다. 사랑하면 보이게 되고 그 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움을 가져다 준다. 설계에 있어 인간을 생각하는 만큼 전혀 예측 불가능한 가정들도 고려될 수 있다. 예측하지 못한 원인들로 인해 발생했던 실패와 희생으로부터 얻어진 값진 경험과 더불어 마음의 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본다면 이는 곧 인류에게 가해질 위험을 줄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고 자세다. 위협이 제거될 때 개인은 붕괴와 실패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쓸데없는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위 두 책의 저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듯, 실패는 많이 하되 실패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엔지니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세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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