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두 눈을 흰 붕대로 다 가린 채 병실에 홀로 누워 계시던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별 보람도 없는 작품번역 같은 일을 한다고 침침한 불빛아래 밤을 세운 것이 병을 얻게 된 원인같다며 겸양의 표현을 쓰시던 선생님. 완쾌되어 퇴원하시면 아무일도 하지 않겠다던 말씀도 그때뿐, 완전한 시력회복에 실패하시고도 퇴원하여 '서양문학이입사' '미국문화사' 등 집필을 끊이지 않으시던 선생님은 이렇게 학문을 빼놓고는 말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제자 신상웅 교수(예술대 문예창작학과)가 김병철 교수(문과대 영문학과)의 회갑 기념논문집에서 회고하는 김교수의 모습은 '내공하는 열정'그 자체였다.

한국번역문학상, 3.1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 학술원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청소년기에 누구라도 한 번은 손에 집어봄직한 책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있거라', '포우 단편선'등 세계문학전집의 대부분은 바로 김병철 교수의 번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병철 교수는 1921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이듬해 일제의 학도지원병으로 징집당하게 된다. 중국 상해로 출정하게된 김교수는 탈영을 꾀하지만 만주에서 체포되어 남경육군형무소에 투옥된다.

"만약 해방이 되어 7개월만에 석방되지 못했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 축축한 감옥에서 죽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고달픈 건 둘째치고라도 내게 학문하는 기회를 빼앗는 것은 절망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는 김교수는 해방과 함께 중국국립중앙대학원에 입학하여 미국소설사를 전공한다. 영어교사, 미군 번역사 근무 등을 거쳐 1954년 중앙대학교 강사로 서게된 김교수는 1969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특히 김교수는 1987년 33년의 일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그날까지 헤밍웨이 전집 번역, 헤밍웨이 전기출간 등 헤밍웨이 연구에 거의 평생을 쏟았다. 학문을 위해서라면 다친 시력도 돌보지 않고, 미진한 구석을 남겨놓고서는 견디지 못하여 국내는 물론 일본의 도서관 창고까지 다 뒤진다는 김교수. 거침없는 문학에의 집념과 열정은 김교수에게 있어 하나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다.

'건강악화로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글을 쓰지 못하는 인생은 무가치한 삶의 연장이라며 엽총을 입에 문채 방아쇠를 당긴 헤밍웨이. 문학을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마저 바친 작가 헤밍웨이는 자기 인생의 목표인 인고의 한계점까지 도달한 인간이었다. 인고의 한계점까지 살다간 이러한 헤밍웨이의 성실함이 내가 이 작가에게 심취한 이유였다.' 김교수의 한평생 삶의 철학은 헤밍웨이로 귀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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