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축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부터 온다. 11일 비가 내리더니 12일 가지 끝에 물기 오늘 모양은 이내 연두빛으로 피어올랐다.

봄은 늘어진 버들가지서 온다

김영민 교수의 말마따나, "붉은 깃발처럼 나부끼는 목표를 향하여 투우처럼 돌진"하는 우리에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교환가능하도록 표준화된 시간을 살고 있으며, 그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배워왔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고등학생의 현재는 무시되고 이제 우리는 취직을 잘하기 위해 대학생의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 잠시 후 저기 나타날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존재하는 표지판처럼, 우리의 삶도 별 수 없는 것일까.

'진리·일리·무리'는 그러한 물음에 답한 책이다. 먼저, 김교수는 우리사회에 '표준화된 긴급성'팽배해 있는 이유를 지적한다. 우리의 전통과 괴리된 서구 추종의 근대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때 서구 추종을 비판하는 대목은 날렵한 문체의 힘에 기대어 그가 개진하는 사고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진리 추구의 서구 학문 전통에 대한 김교수의 입장은 단호하다.

"진리란 너무 큰 말이다. 그것은 대체로 삶의 실질을 담을 수 없도록 공허한 껍질이며, 역사성의 도도한 강가에 세워놓은 팻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그것은 너무나 오만하다. 스스로 변치 않는 우상이 되어 모든 타자에게 섬김을 요구하는 그것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무력하다. 대체로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진리란, 대화 상대자를 잃고, 터와 역사를 망실한 채 죽어 뻐들어진 어느 일리가 기득권의 금테를 두른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리(無理). 삶의 허망한 방종

무릇 '진리'라 칭해지는 것은 언제나 휘황찬란한 광채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것이 역사적으론 권력과 결탁해 왔음은 이미 증명된 일. 그렇기 때문에 위계를 정하는 일 에 민감하고, 삶의 복잡한 양상을 단순화시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은 배제하기 일쑤이다. 반면 무리는 삶의 터 위를 부유하는, 마치 불꽃놀이와도 같이 허망한 방종에 머무를 뿐이다.

일리는 진리와 무리 사이에 자리한다.

"내가 말하는 일리의 해석학이란 이론과 현실의 간극을 최소화하면서 삶과 세상의 모습에 적실한 해석과 글쓰기의 감성을 되찾자는 현재중심주의인 셈이다." 그 복잡함이 섣부른 단순화를 거부한다면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될리는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두드러지게 된다. "각자의 삶과 그 깨침에 따라 다른 지평과 경지가 열리고, 이에 따라서 해석이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은 인식보다는 오히려 성숙의 문제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가 얘기하는 인문학적인 전통의 복권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의 단초가 느껴진다. 특히 다음 부분에 이르면 그의 관심사가 서구 철학의 지평을 어떻게 가로지를 수 있을까의 가능성이 흥미롭게 다가선다.

"말의 씀씀이가 주로 놀이와 구조의 성격으로 규정되면 당연시 규칙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말놀이의 규칙을 따지고, 그 남용이나 오용을 규명하고, 그 성격을 분류하는 따위는 물론 서양 학문에서 언어를 둘러싸고 벌이는 가장 일반적인 활동이다. 여기서 내가 주로 주목하는 점은 이 활동이 우리의 전통에서 흔히 말하는 수신, 혹은 성숙과의 어떤 관계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내 관심은 매체나 기호로서의 말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말, 성숙의 틈과 경지를 열어주는 단서로서의 말이다."

인식을 넘어 성숙으로 향하는 그의 손길은 또한, 소유 양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문학은 자신의 안팎에 무엇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가 바뀌는 것에서 그 가치의 정화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 양식의 삶이 가능해졌을 때, 각각의 일리가 '화이부동' 할 수 있음은 김교수가 누차 강조했던 바다. 성찰과 자조의 기반위에 쌓이는 것이 성숙이기 때문이다.

성숙으로 향하는 인문학

자기 성찰이나 자조의 여유는 무언가를 끌어모으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또한 앞으로 곧게 나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봄이 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가지 끝을 타고 오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또한 길게 뻗은 뿌리가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며, '진리·일리·무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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