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경우 덴마크 의회 산하 덴마크기술위원회가 주관해 지난 87년부터
해마다 합의회의를 두차례 남짓씩 열어 왔으며, 시민참여를 통해 과학기술정책
의 민주적 결정을 실현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살아있는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암이나 에이즈 등 불치병의 치료약은 어떻게 개발합니까?

질병치료를 위한 행위는 불가피하다고 봐요.” “유전자 조작된 동물들이
자연에 풀려나가 일으킬 생태계 교란을 도대체 예측할 수 있나요?”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논쟁을 거듭한 뒤, 밤을 꼬박 세워 덴마크 의회와
언론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의 주된 결론은 이렇다. “동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산된 상품에는 이를 명시해야 한다. 인류의 질병
치료를 위한 동물유전자조작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지만, 단순히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한 유전자 조작은 그렇지 않다.

동물을 물건처럼 다룬다면 머지않아 사람도 그렇게 취급될까봐 걱정스럽다.”

결론은 일부 정책에 반영됐다. 덴마크 의회가 유전자 조작 방식으로 생산된
물품에 관련 사실을 명시할 것을 규정한 법을 새로 만든 것이다. 지난 92년
9월 덴마크 의사당에서 ‘동물 유전자 조작’을 주제로 사흘동안 열린
합의회의의 대략적 경과다.

눈여겨 볼 대목은 회의 참석자들이 과학기술 전문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고등학생·교사·주부 등 ‘일반시민’이었다는 점이다. 덴마크 기술위원회
라르스 크뤼버 소장은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결정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집단은 전문가등이 아니라 보통 시민”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체득한 ‘상식’과 걱정, 비전 등이 전문가, 정치인
등 정책입안자들의 의견과 어우러져야만 올바른 정책을 마련할 수 있고,
집행력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핵심은 결국 ‘보통사람들의 상식’이 정책
결정의 한 축을 이룬다는 데 있다.

기술위원회 얀 에일스타트 부소장은 “합의회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보통
사람들과 전문가, 정치인 사이에 패인 골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밝혔다.

“경쟁력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로 가려면 민주화가 필수적이고, 이에는 시민
들의 자발적 참여가 절대 필요하다. 때문에 모든 시민이 평생 교육을 받아야
하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만큼 합의회의는 본 회의 6개월 전부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조직된다.
회의에 참석할 ‘시민패널’은 보통 14명의 일반시민으로 구성된다.

기술위원회는 텔레비전 방송과 신문 광고, 또는 표본추출된 2천여명에게
편지를 보내 나이, 성, 교육정도, 직업, 거주지역 등 사회인구통계학적
기준에 따라 시민패널을 엄선한다.

선정된 시민패널은 ‘높은 질’의 토론을 위해 본 회의에 앞서 관련 전문가
집단의 조언을 받아 두차례의 준비 모임을 연다. 본회의는 텔레비전 중계와
언론보도라는 사회적 확산기제와 연계해 사흘동안 열린다. 이른바 전문가와
관료, 거대 기업이 효율과 경쟁력 만을 내세우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덴마크가 민주적 과학기술 정책 결정의 모범사례라 할 합의회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데에는 이 나라의 몇가지 특수사정이 작용했다. 네덜란드
라테나우연구소의 리니 반 에스트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덴마크는 인구가
5백20만명으로 비교적 작은 나라다. 사회적 복잡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얘기다.

그리고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절대 다수당이 없이 여러 군소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해 정치를 이끌어 왔다. 이들은 정치불안의 소지를 안고 있는 현실을
오히려 광범한 사회적 합의의 토대로 삼았다.”

합의회의는 이미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영국이 이미
덴마크의 경험을 빌려 합의회의를 열고 있고, 프랑스와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이제훈 <한겨레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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