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떤 형태로의 운명을 살지만 예상하지 못한 운명에 슬퍼하고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우리들은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전혀 없는 몸으로 태어난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기에 발이 있고, 손이 있고,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고, 말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함을 생각도 못한 채 몸을 가지고 고통과 번민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육체의 고통을 참아내고 자기의 무거운 짐으로 달갑게 받아 짊어진 화가 박상덕씨(40)를 찾아갔다.

그는 고열로 3살 때 소리와 말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4살때 아버지가 경영하던 피대줄에 왼팔마저 잃어 어린 나이에 3중 장애라는 짐을 지어야만 했다. 듣지도 말하지도 한 팔마저 없는 박씨의 어린 시절은 힘겨웠으나, 병원에서 취미로 그리는 그림이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중학시절 나부영(현재 동국대 교수)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중1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꾸준한 노력으로 80년 동아미술제 입선, 한국 문화미술전 은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상이라는 영광이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후 서울미술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어 장애자라는 사실이 더 이상 그에게 짐이 되거나 슬픔이 되지 않았다.

"그림은 나의 표현이야"라는 박화가의 수화에서 어렵사리 박화가의 작품과 인생사가 얽혀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데뷔 당시 그림은 배와 '휴식'이다. "여행갔을 때 항구에 정착되어 있는 배를 이상하게 평온함과 안식을 느껴서 배를 그리기 시작했지"라고 그는 말한다.

"여행을 무척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려요"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시냇가 이야기', '개울 있는 마을', '설가' 등의 자연적인 소재의 풍경화가 많았다. 또한 2~3년 전부터 그는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가 사라져 가는 안타까움에 우리의 것을 보존, 전수시키기 위한 '기억 찾기'라는 테마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진감래'라 할까? 그는 27살 때 심장이 좋지 않아 강릉에서 요양할 때가 심적, 욱체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이후 슬럼프를 딛자마자 89년 6월에 평택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한국미술협회 회원전, 경기 중견작가 초대전, 광주비엔날레 기념전 등 많은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최고상을 꼭 받고 싶어요"라는 박씨의 포부는 화가로써 너무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유화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작업실에서 그의 소망도 번져 나간다. 그에게 더 이상의 장애는 없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