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를 다룬 '크라잉 게임'에서 천성얘기가 나온 건, 동성애자인 한 남성이 이성애를 추구하는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이유에 있다. 왜 같은 남자인 날 사랑하는가 하는 불쾌스러운 항의에 그 동성애자,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남자는 "천성인걸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그 우화 하나로 어쩌면 이 영화는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도 있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전하는지도 모르겠다.

고정관념. 이것을 맑스주의 정치운동가이면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펠릭스 가따리의 경우 다르게 말할 것이다. '권력의 미시 파시즘화'라고 말이다. 왜 새삼 파시즘인가? 이렇게 반문하는 것도 한번쯤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까지 파시즘하면 히틀러의 전체주의나 군사독재체제의 파시즘, 즉 국가 중심의 파시즘을 보고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이 파시즘의 전부이고 그 외부는 투명한 듯이 오인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가따리도 주장하듯이 우리가 생활하는 도처에는 이상한 파시즘의 기운들이 퍼져있다. 가족, 학교, 그리고 회사나 기타 사회단체들 곳곳에 '고정관념'으로 묵인되는, 혹은 별 수 없는 '천성'으로 묵인되는 말과 행위들이 그러한 경우이다. "여자애가 왜 그렇게 거치냐?" 혹은 "남자애가 왜 그렇게 얌전하냐?", "결혼한 아줌마가 왜 아직까지 학교에 있어?" 등등.

무의식중에 던져지는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상처를 주는 건 고정관념을 넘어 한 개인의 잣대나 권력으로 타인을 단죄하려는 욕망의 파시즘 때문이다. 이는 이성과 감성, 여성과 남성,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인 고질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더 큰 문제는 그 사고가 집단화되면서, 즉 사회적 질서가 되면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있다.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동질화하려는 관성, 조직사회를 균열없이 '조화롭게' 유지하려는 사회적 요구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개인의 특성과 개성, 무언가 하고자 하고 자유롭게 느끼려는 욕망의 흐름을 차단하게 된다.
인간에게 천성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게 전부일가. 1%의 천성이 있다면, 99%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따리가 소수자를 강조하는 것도 그 한 맥락이다. 물론 양적으로 소수라거나 중심에 대해 일탈한 '주변성'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를 강조한는 것이다. 여성되기, 어린이되기, 부랑자되기 등의 '되기'. 이는 먼저 고정관념이나 순응적인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 특히 미시 파시즘에서 벗어나 새롭게 자기를 만들어가는 길이다.

이성=남성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여성되기, 동질화된 어른의 표현과 사고, 행동에서 벗어나 어린이되기 등은 다양한 개인의 색깔과 차이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만듦'의 길이다. 여기서 의심할 건 내 무의식 속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감성'을 가르는 이분법적 발상이고, 타인의 말에 길들여져 가는 자기 자신이다. 타인이 던진 말과 자기검열의 늪에 빠져 고통받는 이일수록 더 새로운 '다르게되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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