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밴드 편성의 주류가 록음악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 특정 시기에 돌출적으로 등장한 소수의 록 밴드가 일부의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을 뿐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 TV와 거리를 두고도 데뷔앨범을 70만장이나 팔았던 록 밴드가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폭발 혹은 질적 비약(?) 그렇게 말하는 건 '운대가 맞았다'는 말만큼이나 간편하긴 하지만 어떤 다른 의도 때문이 아니라면 대상을 신비화시키는 것이다.
들국화가 등장한 1985년은 여전히 외견상 조용필의 시대였다. 하지만 모두가 한 명의 가수만을 바라보는 이 이상한 '일인 제국'의 전체주의는 균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영록과 이선희가 조용필의 아이돌 스타 지위에 '동승'했던 것과는 달리, 들국화는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균열을 가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들국화는 소위 '신촌 언더그라운드'출신이다. 이 '씬'은 거칠게 말해서 반아마추어리즘으로서의 프로페셔널 뮤지션쉽, 반상업적 견지로서의 진정성 이데올로기, 그리고 비정치적 태도로서의 순수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들국화는 자연스럽게 TV라는 인공적인 공간 대신 콘서트를 자신들의 장으로 삼았고, 그것은 이제까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여과되고 굴절된 수동적인 청취경험의 미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적 체험을 바라던 일군의 20대(와 하이틴)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80년대 새로운 감수성을 무기로 등장한 들국화는 주류, 비주류의 균열을 이끌어냈지만 근본적으로 주류 와 적대관계를 갖지 않는 모순을 지닌다.
물론 이들을 공연장까지 견인한 요인은 1차적으로 들국화의 음악이었다. 고단한 세상살이의 경험에서 나온 리얼리티와 낙관적 의지가 담긴 '그것만이 내 세상'과'행진'은 5공화국과 '가요톱10'의 독재적 매너리즘에 백 비트의 규율을 넘어서는 드럼 그리고 보헤미안적인 피아노 그리고 최성원의 로맨틱한 미성과 독특한 진행의 베이스가 감싸안는 여성적인 섹슈얼리티와 대립적이면서도 묘한 상보 관계를 이루었고, 그것은 조용필과는 다란 차원에서 다양한 취향을 포섭하는 동인이 되었다.
이제 젊은 수용자들은 진부해 보이는 뽕짝이나 생각 없어 보이는 10대용 음악과 구별되면서 팝송의 감수성과 부합하는 '자신들의'음악과 미디어를 동시에 포획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이들이 비로소 자신들만의 공간, 여가, 문화를 욕망하고 실천할 만큼 경제적 여유가 발효되었다는 점이 토대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새로운 감수성 및 여건과 접속하면서 들국화가 추동해 낸 것은 요즘 쓰는 말로 '주류 비주류'의 균열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신촌 언더그라운드'의 성공은 이들의 음악이 근본적으로 주류와 적대적 모순관계를 갖지는 않았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들국화는 프로페셔날 뮤지션쉽에 값할만한 음악적 혁신에도 실패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채 개화하기도 전에 스스로 '밴드'로서의 밸런스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1집의 안이한 재판인 2집과 라이브 앨범 발매, 그리고 밴드의 내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