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세이를 좋아한다.

장르로서의 에세이는 낭만주의 시대이후 특권화된 귀족장르인 시, 소설, 희곡과는 달리 무정형적이고 잠정적이다. 수필가 이창국의 운명(삶)은 에세이라는 형식(글)과 어쩔 수 없이 만난다. 하나의 역사로서의 기억이며 철학으로서의 몽상인 이 에세이집은 이 수필가의 정신적인 자서전이다. 우선 그의 바람이야기를 엿보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었으나 분명 그 속에 숨어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미약해 보이면서도 아주 끈질기고 강력한 것이었다. 축복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한 번 불어온 바람을 의지하고 길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21쪽)

이런 의미에서 이 에세이스트는 분명 "축복 받은 소수이다."그에게 에세이는 바람의 환유이다. 바람은 수필가의 몸통이라는 현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스쳐갈 때 몸통이 내는 소리가 그의 에세이다.

삶의 순응과 에세이의 탄생

그의 에세이 마당으로 가보자. 작가의 봄에 대한 접근은 독특하다. 곧 장난 신작로를 스스로 나선형으로 꾸불꾸불 휘돌아 간다.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봄이 이미 오랜 전에 지나가 버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 인생의 봄과 함께 그 정체가 불분명하고 변덕스럽고.... 이제 나의 봄은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다." (46-47쪽)

봄은 슬퍼할 수 있는 것은 나이 탓인가? 아니면 지혜의 결과인가? 그의 가을은 어떠한가? 더욱더 현명해진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사에 너무 심각해지는 것이다. 심각해지면 즐거움이 사라진다."(26쪽)

이번 가을에는 다시 경박해지자. 그래야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미 작가의 '문학 비평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그는 추상적이고 고답적인 것을 구체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이끌어 내려는 세속적·환속적 상상력을 가진 말꾼이며 글꾼이다. 그는 자신과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역사를 이야기로 뿌린다. 이양기 양식은 근육을 부드럽게 만든다. 부드러움 속에 진정한 역사 의식이 잉태된다.

이로부터 그의 에세이 담론의 정치적 무의식은 윤리적 상상을 시작한다. 그는 이야기를 다시 역사화하고 끊임없이 도덕화하는 알레고리스트이다. 그러나 그의 도덕은 엄숙주의가 아니다. 그의 윤리는 삶과 앎에 대한 비극적 환희를 지니고 존재의 무게의 참을 수 없음이 인접해있다. 그는 차라리 도덕과 윤리를 생태화시키고 있다. 이래야 우리는 그를 따라 소망(小望)을 품고, 험담을 할 수 있고, 매서광이 되고, 사치품을 예찬하고 쓰레기를 미워하지 않고, 오래된 타자기를 사랑하고, 거절을 미학으로 만들고, 가는 곳마다 추억을 꾸미고, 한국 호랑이를 다시 이야기하고, 흑석동 시장을 좋아하면서... 이제 그만 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가에 서다

강가 작가에게 존재의 젖줄인 무의식이며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억의 저수지이다.
"남한강이...흘러가는.. 이곳은... 아직도 구석구석 나의 어린 시절의 손과 발, 그리고 닿았던 곳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때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기하고 회고에 잠겨보는... 나에게서 추억이란 거의 모두가 이 강과 관련된 것이고 강과 분리시키면 별로 흥미도 없어지는 것들이다." (28-29쪽)

왜 "다시" 한번 강가에 서는가. "다시"는 회상으로 들어가는 타동사이다. 회상은 몽상의 환유적 시공간이다. 그러나 그는 왜 앉거나 눕지 않고 서는가? 회상의 강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강"의 고혹적인 욕망을 잘 느끼고 있다. 이제 유혹의 강은 더 이상 그가 심연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재(또는 미래)와 산(혹은 도시)으로 되돌아 가야할 곳이다. 그는 강건한 현실주의자이다.

따라서 "다시"는 반복이나 퇴거가 아닌 다시 읽기, 새로 쓰기이다. 그는 삶과 앎을 양피지에 다시 쓴다. 강의 심연은 우리의 본능이며 욕망이기도 한다. 다시 "한번"강에 간다. 강의 생명을 다시 꺼내놓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강"가"에 머물러야한다. 강"속"은 위험하다. 우리의 마음은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이지만 우리 몸통은 이미 잔치를 끝냈다. 강가는 우리를 보호한다. 강가는 공간적으로 변두리이고 시간적으로 종말기이다. 그 곳은 몽상지대이다. 몽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황홀과 절망이라는 극단을 피해가는 중간지대이다.

이창국 에세이의 계보는 어떤 것일까? 그의 에세이는 여러 가지 목소리가 병치되어있다. 가장 큰 맥은 역시 금아 피천득의 수필이 서정성이다. 그의 수필에는 찰스 램, 로버트 린드, E.B. 화이트 등의 에세이에서처럼 해학적, 풍자적, 지성적 목소리들이 가미되어있다. 그의 수필은 새로운 에세이 담론의 장르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더라도 일단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국내 수필문학계의 격을 안팎, 위아래로 확장시킨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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