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다채로운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 쿤데라의 진지함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가벼움은 무거움의 세계를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듯이 ,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진정으로 제대로 보여주려면 오히려 풍부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권성우 ,' 신세대 문학에 대한 비평가의 대화'
최근 들어 문학비평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고민이 팽배해졌다.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이나 문학과 지성(이하 문지)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문학담론 생산자들이 순순하게 지성계의 축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붕당 ,분파로서 파행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같은 분파에서 발행된 문학작품에 객관적이고 냉정한 비평의 칼날을 대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의 판매고를 늘리기 위한 상업적인 비평으로 예전의 예리한 칼 맛이 무뎌졌다는 비판이다.

당대비평 겨울호의 좌담 '90년대 문학의 길찾기'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성욱씨(문학비평론가)는 출판사와 언론에게 문학비평 상업화의 책임을 묻는다."문화산업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베스트셀러 혹은 상업성은 항상 강한 유혹이 된다."는 출판업계의 구조적인 병폐와 "기자의 전문성 부재가 문학담론을 생산하는 중요한 한 축의 역할을 못하게 하고 오히려 유력한 출판자본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는 언론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비평의 상업성. 그러나 문학비평의 위기는 단지 상업성 문제만으로 표출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비평의 당파성에 의한 폐해 역시 무시 못한다는 지적이다. 창비 겨울호 '리얼리즘론의 비판적 재인식'이란 논문으로 직접적 창비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방민호씨(문학평론가)도 민족문학론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리얼리즘 비평이, 헤겔식 '표현적 총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끝내 문학작품에 대해 "비평가가 생각한 현실의 어떤 모델을 전체적으로 따르도록 강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창비의 문학적 당파성이 현실을 어떤 핵심이나 기본원리에 의해 문학작품을 가둔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번영론·현실관·방법론에 입각한 세차원의 핵심적 범주들을 중심으로 일관된 체계를 형성한 창비의 당파성이 이젠 되려 비평의 악재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방민호씨는 결국 최근 1년간 계속 되어온 진정석, 윤지관, 김명환, 김외곤, 김이구 등의 리얼리즘 논쟁에 참여한다. 리얼리즘 비평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재해석을 통해 오늘날 우리 문학비평체계가 처한 위기를 넘고자 함이다.

거의 주장은 헤겔의 총체성에 대한 비판과 같은 궤적을 그리며, 끝내 리얼리즘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정석씨(문학평론가)가 ' 얼버무린'민족문학과 모더니즘의 '융합' 마저도 넘어서는 지점을 선보인다. 이를테면 반년간지 '민족문학사 연구' 하반기호에 실린 특집기획중 예전의 글을 수정 보완한 '민족문학과 모더니즘'에서 진정석씨가 "민족문학과 모더니즘을 변증법적 구도로 봐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 등에 대해, 이를 넘어서 비평이나 창작의 방법적 자유를 인정하는 속에서 리얼리즘을 획득해야 할 것이라고 못박는다. 즉 총체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의 마키아벨리주의적인 전통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탈당파적인 비평이되, 진씨보다 한 걸음 나아가 창작이나 비평의 사유에 마음껏 자율성을 부과하자는 방법론적인 주장으로 해석된다.

구체적으로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백낙청 교수(서울대 영어영문학)에 대한 비판에서 손쉽게 엿볼 수 있다. 백교수가 신경숙씨(소설가)의 장편소설 '외딴방'에 대해 지역차별 등의 문제를 부각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열악하고 고립된 공간 속에 묻혀 있는 '나'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것이며 그것을 심미적인 감수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총체적인 환원성을 비평을 통해 작가에게 강제했을 경우 작가의 창조성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문학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방민호씨가 민족문학에서 이야기되는 당파성을 문제삼았다면, 상대적인 당파로 현현되는 문지계열에서도 당파성이 문제되기는 마찬가지다. 겨울호 '문학과 사회'의 '신세대 문학에 대한 비평가의 대화'라는 글에서 권성우씨( 문학평론가)가 바로 자성의 기치를 재건 장본인이다.

소설 '게임오버'와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으로 화두를 꺼낸 이 글에서 권성우씨는 먼저 소설들에 대해서 대중문화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오락소설 그리고 내면의식은 돋보이나 기본적인 글쓰기 훈련이 덜 된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특히 하이퍼텍스트적인 상상력을 취한 '게임오버'에 대해서는 문지 편집인인 김병인씨(문학비평가)의 상업적 혐의가 짙은 비평으로 인해 작품의 문학적 위상이 왜곡되고 있다는 비판을 가한다. "이 세계가 비디오 같고 전자오락 같음을 작가가 아프게 폭로하고 있다."는 의견에 권씨는 '게임오버의 작가' 김설씨는 철학적 성찰은 물론이고 김병익씨가 말하는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러한 경향의 소설이 '대중적 호응'과 '진지한 비판'이라는 두 가지 영예를 모두 차지하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지나친 욕망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결국 권성우씨는 지나친 상업적 돌출로 인해 문지 본래의 지향점인 세련된 엘리트주의는 이제 모습을 감췄다는 회의에까지 다다른다. 기존의 무게감을 중시했던 비평과 창작이 대중지향적인 가벼움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따라서 비평 역시 당파성과 출판사업주의에 의해 작품들의 이러한 문제점을 방치한 채 희석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신 있는 비판'. 결국 그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 다다라서 해결의 실마리를 엿보는 듯 하다. 그의 처방전은 '포에티카'의 '비판네가지 방식1'에서 지적했듯 이른바 '끌어주기식'의 등단과 이에 화답하는 '밀어주기식'의 비평이 오고 가는 사이에 문학계에 비평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지적에서 시작한다. 권씨는 "이제 문학 비평도 적당히 눈치보면서 애매한 표현으로 비판과 칭찬 사이에서 줄타기를 벌이지 말고 수신 있는 비판의 실명화를 수행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비평의 의기라는 문제는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 비평계의 당파성과 상업성에 천착한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인물과 사상' 4권에서'창작과 비평이라는 정부를 세운 백낙청'을 통해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는 "같은 식구는 키워 주고 식구가 아닌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식의 비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비판이 있지만, 감히 그 누구도 그걸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바로 당파성의 위력 때문이다.

이 위력에 대항하는 펜촉의 날카롭기가 예사롭지 않다. 민중주의에 경도된 채 리얼리즘의 총체화보다는 '예각화되고 다각화된 사실적'비평으로 작가의 창조성을 살려야 한다는 펜촉이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에 매료돼 무게 있는 순수성을 잃어가는데 방관하는 비평에 '소신'이 깃들어야 한다는 행동지침적인 펜촉도 있다. 이것은 아예 스승격인 선배 평론가들에게 지성의 외침을 던지는 것이 기도 한다. 어찌보면 비평계의 '극단'에서 탄생한 젊은 평론가들이 펜놀림에서 '무게감이 승화된 가벼움 '이라는 접점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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