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마지막회를 골라 극장에 들어가도 빈자리가 얼마 없었다. 시작과 함께 영화에 빠져든 관객들은 쉴 새 없이 웃고 있었다. 영화에의 몰입. 몇 년 전 '체인지'를 보면서 여중생들이 영화와 대화를 나누는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이래 처음이다.

월요일. 자막이 끝나기 전 불이 켜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10명의 관객들이 서로의 표정을 살핀 뒤 극장을 나간다. 개봉 첫 주의 흥행성적이 유지된다면, 영화를 만든 신인감독은 두 번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할지도 모른다.

주목받는 두 신인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이방인'이 상영되는 극장의 분위기는 이렇게 달랐다. 동시에 이 차이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접속',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로 이어지는 흥행기록의 저편에 제작비를 건지지도 못하고 간판을 내리는 영화들이 있다. 여기에 정권교체에 따른 영화정책의 변화와 IMF체제로 인한 영화산업의 위축은 98년에 새롭게 등장한 변수다.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며, 그래서 용기 있는 소수가 필요하다.

그들이 진실하면서 대담한 방법으로 살얼음판을 걸어나간다.

맨 처음 앞으로 나선 사람은 허진호 감독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장르영화의 틀에서 출발한 뒤에 그것을 넘었다. 이러한 방식은 2년 전 갑자기 등장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던 '돼지가 우물에 빠지던 날'과 다른 것이다. 자칫하면 실패했을 모험이 오히려 강한 상업적 호소력을 만들었다. 60만이 넘는 관객이 그 증인들이며, 이는 동시에 느슨한 서사구조나 사색적인 화면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관객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한석규라는 흥행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를 풀어버리고 영화적 요소에 집중하는 작법은 요즘의 신인감독들이 가진 공통점이기도 하다. 문승욱 감독도 여기에 속한다. 폴란드에서 유학하고 삼성단편 영화제에서 수상한 그는 유학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방인'을 만들었다. 영화는 타지에서 들어와 부유해 버리는 국외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방인'은 대담하지만 모호하다. 상업성에 집착하지 않고 감독이 원하는 바를 표현하고자 노력했지만 어딘가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가족과 헤어져 유럽을 떠도는 태권도 사범 김(안성기)은 결국 딸을 찾아 베를린으로 떠나지만, 또 하나의 상징적인 가족을 폴란드에 내버려두고 떠난다. 폴란드인 촬영감독에 의한 세련된 화면도 소용없이 '이방인'과 'Taekwondo'(영어제목)사이에서 방황하는 감독은 주인공 김을 닮았다.

허진호와 문승욱에 의해 시작된 98년의 한국영화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봄이 되어 아카데미 수상작들의 열풍이 지나면 또다른 한국영화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과 같은 기대작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을 때였다. IMF를 이겨내자는 문화영화와 아카데미 후보작과 여름에 개봉될 불록버스터의 예고편이 끝나고 나서야 본영화를 볼 수 있었다. 첫 장면은 도로를지나는 스쿠터. IMF라는 어려운 상황과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로 주눅든 거리를 한석규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스쿠터에 앉아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 한국영화는 언제나 이렇게 다가온다.

권용민 <영화학 석사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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