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의 구수한 파노리 한 대목이 한국의 소리를 대표한다면 한국의 색을 대표하는 것은 아마도 닦으면 닦을수록 그 빛을 발하는, 시골집 할머니가 부엌 깊숙히 정성껏 쌓아놓은 유기그릇의 색깔일 것이다.

'안성마춤'

안성 유기에서 유래된 이 말을 되새기며 50년째 유기일을 하고 계신다는 김근수(82)옹의 안성마춤유기공방을 찾아나섰다. 안성군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유기공방을 찾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공방안으로 들어서면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유기 만드는 일을 하는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단지 한쪽 구석에서 말없이 놋그릇을 포장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이곳은 유기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고 공장은 다른 곳에 있어. 제 1공단은 대덕면에 있고 제2공단은 미양면에 있다"는 것.

아쉬운 마음으로 김근수 할아버지의 행방을 물었다. 잠시 후에 오니까 그 동안 구경이나 하라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공방 내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칠첩 반상기를 비롯해 화로, 종, 징, 꽹가리. 촛대, 마패 등이 그 화려한 빛을 뽐내며 진열되어 있었으며 특히 호랑이, 돼지, 말, 사습 등 동물상들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도 두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상은 조금만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보였다.

30분쯤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 드디어 김근수 할아버지를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돋보기 안경에 흰 고무신을 신은 채 나타난 할아버지는 올해 나이 여든 둘, 실제 나이에 비해 훨씬 정정해 보였다. 김근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처음 유기장 종업원으로 취직해서 지금까지 유기일을 해왔다고 한다. 한편 "안성은 조선시대부터 서울의 관문이자 3대 시장의 하나로서 창호지, 가죽, 담뱃대 등을 만드는 공장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안성 유기장의 유기 제품들은 모양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대가들의 주문이 많았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6·25이후 유기 산업은 유기그릇이 연탄가스에 쉽게 탈색되고 '양은 그릇'이라고 부른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그릇의 편리성에 밀려서 사향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 많았던 유기 공장들은 하나, 둘 문을 닫게 되고 지금은 유기 기능 보유자인 김근수 할아버지만이 전통유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이 업을 이어가고 있다.

할아버지는 스테인리스에 싫증을 느낀 수요자들의 다시 유기제품을 찾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기 만드는 일을 가르치는 교육단체가 없고 천상 공장에 가서 직접 배워야 하는데 일이 힘드니 누가 오나, 요즈음은 인력난이 가장 큰 문제라네"라며 근심어린 표정을 보였다.

어렸을 적 할머니께서 무슨 날만 되면 깊숙히 간직해 두었던 놋그릇과 수저를 꺼내 잿물에 지푸라기를 적셔서 종일토록 닦아 빛을 내던 기억을 아련히 떠올리며 유기공방에서의 마지막 발걸음을 돌렸다.

'안성마춤'의 고장 안성에서 그 찬란한 놋의 빛깔이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기를.

<박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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