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라는 놈이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존재의 이유를 갖기 위해서 어떤 객체를 찾아 그곳에 주체가 갖고있는 방법으로 각인을 하여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별한 물건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것, 즉 특별한 물건을 예술이라고 넓게는 부르고 좁게는 작품이라고 부른다. 작품에는 주체가 표현하는 독특한 방법의 성격이 있어 이를 요즈음에는 캐릭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80년대, 그 격동이 잇고, 드라마가 펼쳐지고, 절망하고, 배신당하고, 움추려 있던 시절, 주완수는 존재라는 확인을 위하여 자신의 세계에서 객체를 만화로 택하였고 보통 고릴라라는 각인으로 특별한 물건을 우리에게 던졌다. 그것은 6. 29이후 우리에게 다가 온 풍자였고 익살이었으며, 신성한 충격이었으며, 살맛 나는 세상이 온다는 소식이었으며, 곧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공간에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가 우리 저항문화의 어떤 것이었으며 그 시절 사회적 정서를 어떤 위치에서 반영하였는지 등에 대하여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또한 주완수가 술꾼이고 방랑벽이 있으며 사람 좋기는 어떠하다는 말도 떠벌리지 않기로 하자. 그건 만나보면 알 일이고 주완수가 남을 만나는데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완수의 특별한 물건, 보통 고릴라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절실하게 던져준 것은 이미지의 신화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만화의 캐릭터는 50년대 이후 고바우나 두꺼비를 대표되는 신문만화의 캐릭터 이상이 아니었다. 그 이유야 유리가 갖고 있는 문화적 구조의 문제이지만 고바우나 두꺼비가 갖고 있는 신문만화의 저널적 특성의 권위이기도 했다. 이때 즈음 주완수는 네칸 만화의 소박한 셀러리 맨의 애환으로 보는 만평의 세계를 탈출하여 원시림에서 빌려온 캐릭터로 화면 가득채우고도 모자라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보통 고릴라로, 표정도 없고 별반 매력도 없는 이미지로 그때까지 지켜온 만화의 칸을 탈출했다. 그의 특별한 고릴라라는 특별한 물건에 의의를 달고자하는 점은 이러한 우리에게의 접근 방법이다.

아프리카 어느 열대림 속에서나 자바섬의 원시림 속에서나 또는 10여년 쯤 마다 리바이벌되는 헐리우드 영화속의 킹콩으로 연상되는 보통 고릴라의 캐릭터가, 우리 문화와 전혀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캐릭터가 갑자기 친숙하고 어린 시절 몇번은 딩굴었을 만한 캐릭터로 다가오게한 주완수의 특별한 각인이다. 우리는 간혹 우리 만화를 이야기 할 때, 한국적 캐릭터의 부재 혹은 가장 한국적인 캐릭터가 국제적인 캐릭터라고 고집하고 있다. 물론 이 말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주완수는 비한국적 캐릭터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었고, 그보다 다른 평가로 보고 싶다면 칸 만화의 도국적 탈출로 만화와 회화 혹은 예술작업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는 틀을 제시했다는 신화일 것이다. 만화가 갖고있는 문화적 협소성을 무너뜨리는 동시적 이익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주완수를 작가로 만드는 이유이고, 이 시대의 작가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조금은 생각해보자. 만화도 문화도 흐르는 것이고, 그저 저기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와 부상속에 만화도 있는 것이고 없기도 한 것이다. 주완수가 벌이는 문화의 신화타기를 즐기면서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생각해 보자.

<김영배, 상명대 만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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