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사는 '하위문화의 방황 그 한계를 넘어서'라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 기획에서는 기존에 지녔던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정신이 거세되고 있는 하위문화의 문제점을 장르별로 지적한다. 아울러 산적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까지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이제는 '대학문화'라는 화두를 슬쩍 꺼내기만 해도 "언제 나온 얘긴데 또 우려 먹느냐"는 짜증섞인 반응들이 만만치 않다. 지난 몇 년동안 대학문화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수많은 질문들이 던져졌음은 물론이려니와 90년대 대학이 앓고있는 신종 '문화병'을 치료코자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노력들은 지리멸렬한 담론끼리의 전쟁을 생산해 냈을 뿐, 어떠한 구체적인 확답도 보여주기를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짜증스런 반응은 당연할 수 밖에 없고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건 밖에 있건 모두의 어지럼은 강도를 더해가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대학문화가 많은 혼란과 동요를 겪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뚜렷한 사회인식을 기반으로 함께 나가야 할 길이 명확했던 80년대, 저항과 투쟁의 공간으로 상징되던 대학문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변혁운동의 전망이 불투명해지는 난관에 부딪힌다. 이처럼 대학문화가 정치·사회적 실천의 와해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밀어닥친 대량소비문화의 유입은 대학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흐려놓았고 이전 세대의 문화 사이에 단절을 초래했다.

이제 대학주변은 소위 화려한 자본주의의 꽃으로 무차별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책방이나 소극장은 드문드문 손에 꼽기조차 민망할 정도인데 반해 호프집, 소주 편의방, 커피 전문점, 당구장, 노래방 등 새로운 소비문화 공간은 헤아릴 수 없다. 대학내부로 들어와만 보더라도 95학번 이후의 세대들은 대학문화와 대중문화의 변별 자체를 부담스러워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학문화는 사라진 것인가? 대학내 주체들이 아무리 고민하고 반항을 해봤자 주류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체계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가? 어줍지 않게 과거에 대한 기대속에서 장밋빛 미래만을 꿈꿀 것인가?

대학은 언제나 한 사회의 비판의식을 양산하고 또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것은 대학이라는 곳이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교류와 발언이 허용되는 몇 안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학이 사회에 대해 지극히 견고할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학의 이상이 사회의 그것과 부합되지 않을 때 강력한 대항매체(counter-media)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항매체로서의 자격에 대한 끝없는 '향수'라는 점이다. 6월항쟁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지겨운 얘기지만 시대는 변할만큼 변했다. 대학이란 공간내에 저항적 주체들은 이제 다양성과 실험성으로 똘똘 뭉친 개인들로 분화되었다. 게다가 유행처럼 넘쳐나는 문화담론의 홍수속에 현기증을 느끼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렇게 변화된 분위기 와중에도 '저항'을 기억하는 인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과거와의 차이에서 오는 자기 정체성의 균열이 가속화되는 동안, 대학인들은 필연적으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수용하고 이것은 대학 고유의 특성을 요구되던 비판정신·저항정신과 접목된다. 혹자들이 간혹 '대학내에서 저항은 신화로 군림한다'라고까지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있는 주장인지 실감케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저항'에 대한 강박관념이 또다른 형태의 자기 올가미가 된다는 사실이다. 대학생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극심하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바, 반문화(counter-culture)를 화두로 한 이야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즉 주류문화에 반기를 든 펑키록커, 동성애자, 비트세대 등을 껴안아 보겠다는 의욕을 내보인 셈이다.

주류질서에 역행하는 그들의 감수성을 기존의 대학문화와 접목시켜 새로운 저항에너지로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복잡한 작업이 뒤따랐다. 우선 하위문화의 키워드를 해석할 기본지식이 필요한데다 그것들이 휘청이는 대학문화에 어느정도 힘을 실어줄 수 있을는지에 대한 연구 성과물도 확보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보수적인 관념까지 뒤집어 엎을 시각의 변환도 마련해야 했다. 다행히 제2대학이라는 자치강좌나 각종 문화잡지를 통해 지식은 습득되는 듯했고 소위 하위문화의 매니아들을 비롯한 안정된 소비집단의 구축도 이루어 지는가 싶었다.

그 결과 페미니즘이 물위로 떠올라 숨을 쉴 수 있었고, 무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신해철이 강단 한번 밟을 수 있었으며 , 금기시 되던 야한(?) 얘기가 음지를 떠나 밝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탐색의 시간은 길어져만 가고 직접적인 저항 에너지는 약화될 뿐이다. 오히려 쏟아지는 지식속에서 대리체험은 저항력을 희석시킬 뿐 여전히 대중문화의 포로일 수 밖에 없다는 미심쩍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게다가 우리 대학인들은 기존 질서속에서 '저항'이라는 명분으로 마이너리티들을 충실히 관찰했을 뿐이지 그들과 아무런 접점도 발견하지 못한 채 허울좋은 다문화주의를 방패로 또다시 우리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제는 과거의 통념속에서 대학문화를 구속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을 또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화적 '표상'들을, 사회에 개입하고 발언하기 위한 도구로 일관되게 이해하는 동안 대학내 수많은 문화적 담론들은 실천에 앞서 그 빛을 잃었다. 과거의 영광이 오늘에 와서는 왜 당위성을 잃는지에 조바심내 하기보다, 변화된 세상은 그 속에서 자생한 새로운 감수성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 대학문화냐? 지겨워!"라고 짜증을 낼게 아니라,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과거의 틀 그대로 현실을 주조하느라 이만큼 황폐해진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해안이 절실한 때다.

<최보람 기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