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과 벨기에의 두 소장 물리학자가 '지적사기'라는 불어로 된 책을 출간하여 유럽(특히 프랑스) 지성계까 논쟁으로 떠들썩 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서구를 풍미하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프랑스 이론가들이 의미 없는 문장으로 언어유희를 즐기고, 애매성으로 담론을 신비화시켰다면서 '지적사기'라고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이 책의 공저자인 소칼과 브리크몽교수는 주로 객관주의적 전통보수적인 자연과학자의 입장에서 프랑스 이론가들이 원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수학, 물리학적 지식의 오류와 왜곡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어찌보면 객관적 지식과 과학적 논리에 대한 자연과학자와 인간과학자들의 논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본격적인 문화전쟁은 아니더라도 '(프랑스)문화 대 (영미)문화'의 해묵은 논쟁이 분명하다. 17,18세기에 이미 프랑스 신고전주의 극작가들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비교전쟁, 고전식 3일치 법칙을 준수하는 프랑스극과 그렇지 않은 영국극 사이의 우열논쟁도 있었다. 2차대전 직후에도 프랑스 비평에 대한 앙리 페이에르와 H.A.메이슨과의 논쟁, 50년대 말에도 알란 M. 보아스와 이브 본느프와와의 논쟁이 그것이다.

반프랑스주의자들이 맹공하고 있는 60년대 이후의 프랑스 이론은 인식론의 단절화, 신비적인 비젼, 놀라운 기상(奇想), 심원한 논리의 포월 등의 담론전략으로 서구 백인 중심주의, 도구적 합리주의, 가부장적 남근주의, 천민자본주의 등을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 이론이 지니는 저항성, 위반성, 개입성, 전복성은 대학에서 주로 서구학문과 이론을 공부하면서 주체적인 학문을 수립하는 우리에게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이 될 수 있다.

프랑스적 에스프리는 명민한 혼돈의 감식력을 토대로 하는 섞음의 미학이며 퍼뜨림의 정치학이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언어적 대전환'에 따라 '다시 읽기·새로쓰기'를 통해 끊임없는 이론적인 사색놀이를 내밀하게, 즐기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를, 라캉은 프로이트를, 바타이유는 헤겔을, 푸코는 니체를, 알튀세르는 맑스를, 데리다는 후설을 다시 읽고 새로 썼다. 이런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철학 과학 문학을 섞고, 바르트는 기호 문화 문학을 퍼뜨린다. 블랑쇼는 철학자 작가 비평가로 합쳐지고,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가 언어학자 문학자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영미적 사유의 인식소는 경험주의, 실용주의이다. 대부분의 영미인들에게 프랑스식 '차연(差延, differance)'의 미학과 '해체'의 윤리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느림'과 '신비'로 보여질 수 있다. 프랑스적 사유는 분명 노장적·선불교적 사유는 흔적이며 우리와도 어디에서인가 만나는 부분이다.

지금은 포스트식민주의적 세계화시대에 '동일성'마저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동시에 충돌하는 문화들 사이의 '차이성'을 감식하여 궁극적으로는 '문화 VS 문화'를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시공간으로 확보해야 할 시점이다. '지적사기'와 같은 극단적인 작업은 문화 대 문화 사이의 진정한 대화적 상상력보다는 그저 문화식민지콤플렉스나 문화우월주의가 벌이는 지적 선정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유럽과 북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같은 의사문화전쟁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인식론적 대전환을 위한 사상계의 또다른 지각변동으로 보이기보다는 서구인들 사이에서 국가간 문화적 패권주의와 학문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정정호, 문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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