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차별을 논하면서 제주도를 거론하면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화려한 관광명소인 그 곳 역시 본토로부터 많은 착취와 억압을 당해온 게 역사적 사실이다.

지난 28일 '제주:내국식민지'라는 주제로 열린 역사문제 연구소(소장:김정기) 한국사 교실에서 발제를 맡은 현기영씨(소설가)는 제주도가 고려에 예속된 시기부터 제주도의 불운한 역사의 시작을 찾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불안하게나마 독립을 유지하면서 신라에 조공을 바치던 제후국이었으나 고려 숙종때(1105) 탐라국호가 박탈되고 일개의 군(郡)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후부터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서 파견하는 중앙관리인 경래관(京來官)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렇게 고려에 직접 예속되다 보니 많은 진상품이 부과되고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경래관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가 이루어지면서 끝내 도망의 민란을 초래하게 된다. 양수의 난, 번수의 난, 문해노의 난 등이 대표적인 난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몽고는 일본정벌을 위해 제주도를 고려에서 분리하여 지배하에 두고 이곳을 병참기지화한다. 이때에 말 1백60필을 들여와 처음으로 이곳에 목장을 조성하는데 이에따라 생긴 목양과 늘어난 진상의 의무는 더욱 이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한편, 제주도가 갖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제주도민들이 많은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는 언제나 유배 일번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말을 돌보는 일이나 중요진상품인 귤 농장의 보초서는 일, 그리고 본토와 왕래하는 배의 사공일을 담당하는 등 당시 아주 천한 일들을 담당했다.

게다가 이러한 일들 대부분의 경우 고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에 결국 세월이 흐를수록 도망가는 장정의 수가 증가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섬 밖으로 많은 이들이 빠져나가자 조선 인조 7년에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지기에 이른다. 이러한 출국금지령은 이백년동안 힘을 발휘하면서 제주도를 해상감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그들에게 억울함을 표시하고 본토에 그것을 알리는 유일한 의사소통수단은 민란이었다.

제주의 인재를 등용하기는커녕 진상과 가혹한 의무만을 강요한 중앙정부는 민란이 일어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몇가지 요구사항을 들어주었을 뿐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현기영씨는 "제주민들에게 노자의 사상이 결합된 현대의 아나키즘과도 일맥상통하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주도민의 마음속에는 빼앗기고만 하고 베풀어준 바없는 왕실과 중앙정부를 배제라고 도민만의 섬, 즉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싶은 염원이 가득했던 것이다.

<우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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