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배타적 블록권을 형성하면서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연대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서구의 근대성이 실패하고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동아블록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섣부른 낙관론 보다 여러 변수를 고려한 신중론이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 담론의 흐름을 점검해 본다. <편집자주>

동아시아는 과연 21세기에 과연 황금기를 맞이할 것인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은 논지에 따라 약간의 편차를 보이지만 다가올 세기에는 동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중심이 된다거나 혹은 동양사상이 서양철학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점친다. 이런 다양한 논의를 이 글에서는 편의상 '동아시아 담론'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도록 하겠다.

동아시아 담론이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두 방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동아시아권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전이다. 일본의 경제대국화에 이어 한국(남한)대만 싱가포르 등 이른바 '유교권' 국가들은 70년대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최근에는 사회주의 중국조차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도입의 일대를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담론 유행의 두 번째 배경은 후기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서양사회가 근대성의 위기에 부닥친데서 찾을 수 있다. 근대 서양은 '이성'의 이름으로 동양을 '미신(신비주의)'과 '미개'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비판해 왔으나 이성이 낳은 자신들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파시즘공상주의가 이성을 다시 부정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부터 '이성의 타자(他者)'로서 동양적 가치관에 눈을 돌리는 연구자들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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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성장

서양근대성의 위기속

동아시아 담론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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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봉건주의의 대명사였던 유교는 새로운 가치관의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대안으로 갑작스런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유교의 예(禮)를 '개인이 자연스레 행동할 수 있는 적절한 도덕적 테두리(an appropriate moral framework)'라고 해석한 허버트 핑가레트(Herbert Fingarette) 교수의 논의나, 자임(自任)과 자득(自得)의 개념을 도덕적 개인주의(moral individualism)라고 명명한 콜럼비아 대학의 윌리엄 드 배리(william de Bary) 교수의 논의 등이 그러한 예이다.

최근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상호보완적인 경제 블록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로 발전하고 있다. 국제경제가 블록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써 동아시아 국가들의 불록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사의 다양한 동아시아 담론은 얼핏 서양 제국주의에 유린 당했던 동아시아인들의 자존심을 되살려주는 고무적인 논의처럼 들이지만 몇가지 심각한 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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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전통

동아시아 파시즘

이데올로기 노릇 지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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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경제적인 측면에서 동아시아 담론의 단초를 제공한 '유교가 자본주의 발달에 기여했다'는 명제로부터 짚어보자.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교전통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일정한 기여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런 주장은 구체적인 근거가 결핍된 피상적인 관찰이나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전통이 동아시아 파시즘의 이데올로기 노릇도 훌륭히 맡아왔음을 함께 지적해야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멀리는 일본의 군국주의에서부터 가까이는 박정희의 충효에 대한 강조나 장제스의 도통(道統)이라는 문화적 상징조작은 전통적 사상을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재료로 가공해 사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유교 자본주의 논의와 관련해서 또 한가지 지적할 일은 이런 시각을 받아들이기 앞서 우리 스스로 한국적 자본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해명하고자 한 노력이 얼마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두 번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서양 학계가 동양사상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서 동양사상이 서양의 그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봉착한 문제를 풀기 위한 방편으로 동양사상을 검토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내고 있을 뿐이다.

서양의 동양학은 적어도 그들의 절실한 문제를 풀기 위한 해답으로 철저히 현대화된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우리는 무섭게 받아들여야 한다. 동아시아의 동양학이 오히려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에 고무되기 전에, 동아시아의 전통을 이어받아 취하고 어떤 점을 비판하고 도려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유교문화의 말폐(末幣)까지 겪은 우리로서는 서양의 연구자들이 갑자기 동양을 칭송하고 유교를 예찬한다고 해서 덩달아 어깨춤을 출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세계경제의 추세가 블록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그에 대처하기 위해 동아시아 블록을 형성해야 한다는 식의 논의는 너무도 본능적이고 평면적인 논의다. 열 개도 넘는 유럽의 국가들이 국경과 관세를 철폐하고 단일 시장을 형성한 유럽연합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그들의 원대한 구상과 전망이다. 가장 본능적인 동아시아의 경제블록 형성조차도 아시아 사회안에서 그 블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비전 철학이 마련돼야 가능하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유럽 14개국은 이미 90년대 초반에 공동역사교과서를 만들어냈다. 그들도 한 중 일 세나라 못지 않게 서로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갈등과 분쟁과 복수와 증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등 인접국가 사이의 민족감정도 한 일 감정 못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려 14개국의 역사연구자들이 참가해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낼 정도로 자신들의 과거사를 보는 눈이 성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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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임진왜란'같은 용어

유아적 역사관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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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지금시점에서 한 일간의 공동 역사교과서 서술이 가능할까. 몇날 몇일을 밤새도 기본적인 골격조차 합의할 수 없을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분명히 밝혀두는데, 역사교과서 서술에서 한국은 잘하고 있는데 일본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아적(幼兒的)이라는 점에서는 두 나라가 하나도 다를게 없다. 예를 들어 우리 교과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임진왜란' 같은 용어는 우리 일본관의 유아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이 말은 '임진년(1592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F나 뜻인데 역사과학의 눈으로 보면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용어다. 이 전쟁을 일본쪽이 '조선정벌'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역사는 다양한 주체들이 충돌하는 장이다. 상대방이 인정할 유아적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본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 안에서 남북한 사이에 공동 역사 교과서를 쓸 수 있을 것인가. 동아시아 사회는 아 정도로 공동 인식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저만 지적해두고 다시 원래 논의로 돌아가자.

서양의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와는 다른 집체적 기율이 몸에 붙은 자본주의, 서양의 이성 중심주의와는 다른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사유 양식, 그리고 동아시아 사회의 연대 이런 것들은 '대안적'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고 새로운 조명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피상적인 관찰만을 바탕으로 근거없는 낙관주의나 막연한 당위론은 경계해야 한다. 동아시아 사회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폭을 좁혀 한국은 그 속에서 먼저 치열하게 물어야 한다. 동아시아 담론의 유행에 공연히 흐뭇해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 안에 동아시아를 대변할 수 있는 내용이 갖춰져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스스로에게 전망과 철학이 준비돼 있지 않는 한 어떤 외부의 논의도 우리를 구속하는 또 다른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이상수 <한겨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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