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x romana를 미국은 pax americana로 부흥한다. 중앙대는 지난날의 영광을 오늘에 맞게 부흥한다. 매일 저녁 테레비 화면에 나타나서 조국의 경제적 부흥을 호소하는 총장에게서 21세기를 맞이하는 시대적인 총장으로서의 면모가 엿보이는 듯 하다.

인간사회인데 업무위주, 실적위주로 효율의 극대화를 단순하게 바라는 나머지, 절대단결을 강박하는 예가 제법 지성인 사회에도 있었다. 과거에는 소위 단합대회에서 그런 분위기가 흔히 있었다. 절대단결도 좋지만 부담없이 '대단결'을 외치는 총장에게서 대학사회의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그 주인에 그 신하라는 격언이 어울린다면 더 좋겠다. 총장단의 고충을 이해하고 협조한다는 명색이 옹졸한 과잉으로 이어지는 계층이나 집단은 없는 가.

보다 많은 지성인사회에서의 장점이 대단결에서 돋보인다. 곧 언로가 열려있음과 통한다. 엿먹는 입은 기분이 좋다. 진리는 쓰다. 비판의 소리가 있는 그곳에 번득이는 지성인의 혜안이 깃든다. 지금 당장 철리와 예지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그 기회는 있고, 발전을 위한 발돋움의 자극이 있다.

중앙가족의 언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내가 불만 없다고 남에게서도 그렇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누구나 어린 아이인 때가 있다. 아기가 괜히 보채는 수도 있지만 흔히는 무엇인가 불편해서 운다. 최소한의 배려는 있어야 한다. 그 아이를 치워 버릴 수도 있고 극단적 위협으로 그 아이의 입을 막을 수도 있고, 다시는 울지 못하도록 사과를 받아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부끄럽다. 불편을 염려하고 들어주는 수도 있다. 무엇인가 불편함이 있고 서운함이 있을 때 참고 격려하는 분위기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네가 아직 무엇을 잘 몰라서 일까. 프랑스에 처음 갔을 때였다. 까페에 들어가서 바게트를 달라고 했더니, 곁에 있는 사람이 웃었다. 마치 식당에 들어가서 쌀 한 그릇을 달라고 하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내게 타르티느(바게트를 잘라서 버터를 바른 것)를 주었다. 손을 벤 아이가 손가락을 잘랐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벌을 주는 선생을 못 보았다. 내가 바보가 아니라고 해서 내가 천사인 듯 한다면 착각이다. 해좌중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유치한 봉변을 당할 까봐 적이 염려되었다면 내과 과민일까. 글을 읽고 정말 할말이 있다면 지성을 통해서 하라.

오랜 세월 유유자적한 듯하면, 이제 각별한 각오로 떨치고 일어서야 함은 물론 서두르지 않는 지혜도 필요하다. Festina lente.(Hasten slowly!)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 없기를. 이런 때일수록 차분하게 마음과 정신은 격에 맞는 여유와 안정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때맞춰 메디컬 센터의 기공, 가상대학의 착수 등 발전을 위한 시도들이 적지않게 위안이 된다.

평화를 원하거든 무장하라는 로마의 격언이 생각이 난다. 어려운 형편일수록 완전무장의 뒷받침은 오직 공화정치를 통한 국민군에 의해서 이룩되고 유지된다. 교수직은 그 운신의 폭이 없으니 만큼, 특별 배려되어야 함은 확실하다. 한편 수신제가라 했던가. 구체적으로 한가지 예를 들면, 교수직에는 로테이션을 통한 분위기나 환경의 전환길은 없다. 사소한 말썽도 형편에 안맞는 극약처방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그래도 교수직은 힘이 있다. 현자는 만사에서 배운다. 바보의 수염에서도 면도하는 교훈을 얻는다. 교수는 모름지기 주위에서부터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를 외유내강의 슬기를 있기를 '르네상스'는 프랑스어이다 보니, 그 프랑스 표어도 생각이 난다. '자유·평등·박애'. 거기에 대단결.

이명호 <외국어대 불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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