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왔다. '돌아온 똥간이'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스며들었다.

짙은 곡선을 그리는 눈썹과 안경을 썼음에도 크게 열려 있는 눈, 옆으로 약간 퍼졌으나 시원하게 큼직한 코, 커다란 입매는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더불어 빙글빙글 웃음 짓는 그의 미소는 저자거리의 싸움에 덩달아 신이 나는 개구쟁이 구경꾼 같은 모습이다.

처음이라 그런지, '강연회'라는 딱딱함 때문인지 그는 무겁게 입을 연다. 하지만 문학에 소질 있다고 생각한 첫 순간이 군복무 시절, 시집가겠다는 애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절절한 연애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는 말에 좌중은 웃음과 눈물을 하께 찔끔거릴 수밖에 없다.

제대한 후 학교 문학회에 들어갔고 '시는 문학의 시작이자 끝이다'라는 생각으로 방에 시집만 기백권 쌓아놓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의 말대로 천분이 모자란 탓이었을까, 자신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며 문학을 접어둔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천우를 맞는다. "문학이라는 오래 묵은 나무에서 뻗어 나오는 수억 가닥의 실뿌리와 이성적, 감성적, 감각적인 나의 존재가 맞닿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기세로 완성한 한편의 시로 교내 문학상에 가작으로 당선하면서 좋은 사람들의 좋은 말들을 듣게 된다.

"그들 중에 기형도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프로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아마추어적으로 자기만족의 배설에 그치는 글쓰기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이 주는 무게와 더불어 자신도 문학에 대한 진지한 가능성을 모색하며 이듬해 등단을 하고 출판사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만이 가진 그의 기질은 방향을 달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놀이'다, "노는 것에 인격이 있다면 그도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워낙 다채롭고 창의적으로 놀아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놀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지방에 있는 절을 돌아다니며 사법고시에 뜻이 있는 늙은 학생, 달마의 법을 배워보겠다는 스님을 꼬셔 벌판을 뛰노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놀아본 사람이 일을 해도 잘 해나갈 수 있다는 그의 말이 맞는 걸까. 서울로 돌아와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하여 안정을 찾는다. 그러기를 몇 년, 다시 '놀기' 시작한다. 그는 그때를 자신에 있어서의 '문학의 위기'가 아니었나 회상한다.

"그럴 때마다 기준이 되는 것이 이것이 과연 진정한 것인가,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진정 내가 하고 싶어하고 해야 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또한 그 때의 진정성을 가진 거짓말(창작)은 다른 차원으로 가끔은 그것이 문학성으로 불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강연회를 마친 후 자신의 소설이 내용의 재미에 그친다는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져본다.

"잘봤다고 생각하는데… 글쎄요, 사람들은 뭔가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비장하고 엄숙하고, 뭔가 슬프고 그런 것들이 있기를.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쓰려고 하면 잘 안돼요, 그냥 자신에 나를 맡겨 두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주는 웃음, 그뒤에 오는 날카로움과 쌉싸름함, 따뜻한 여운은 그처럼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문학을 엄숙하게 신적인 의미로 경배를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억지로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학의 유희성이라는 측면에서 문학과 단순하게 잘 어울려서 놀고 싶습니다."

그는 그의 소설만큼 재미있다. 또한 그는 젊다. 결국은 문학이나 놀이, 그의 마지막 말이 녹녹한 웃음과 함께 녹아 들어간다.

박성연 <예술대 문예창작학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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