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은 최근 가장 활발하게 논해지는 작가다. 왜 허영만이 갑자기 주목받고 있는가.

'각시탈', '미스터 손', '날아라 슈퍼보드'가 애니메이션으로 성공했고, '48+1', '비트'가 영화화되었으며 '아스팔트 위의 사나이'가 TV드라마로 제작되는 등의 화려한 작가적 경력 때문인가. 천부적인 만화감각과 문학적 형상력을 지니고 치밀한 자료조사와 그것의 뛰어난 내적 소화력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치열하게 형상화 시켜놓은 작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80년대 후반 '미스터 손' 이후에 등장하는 서구적인 신체골격에 동양적 마스크, 유연한 선, 여성의 성적 감각화, 폭력, 캐릭터의 성격과 표정반응, 액션구분, 배경처리, 상황종료, 반전 등의 스토리 전개상 특징들이 일본만화를 동용한 것이라는 논란 때문인가.

논자들의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작가가 허영만이다. 그것은 허영만 작품의 본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그의 작품세계를 보고 그의 작품 제목같이 카멜레온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다양한 변화와 시도를 해왔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만화에서 중심은 인간이다. 허영만의 만화에서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각 개인은 행위와 관심에 대해 자유롭고 책임있는 선택을 함으로써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성격을 창조한다.

허영만의 인간 본질찾기가 의미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밑바탕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초기작 '집을 떠나서', '변칙복서', '사마귀' , '무당거미' 등은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답답한 현실을 영웅을 통해 벗어나려는 동시에 대리적으로 자기 본질을 찾고 싶어하는 대중을 대변한 작품이다. '금간종', '아메리카 드림', '카멜레온의 시' 등은 한국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는 가운데 인간의 내적 분열을 다룬 작품이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보인다. 중간 계층의 증가로 인해 대중문화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메커니즘이 가속화된다. 자순의 모순은 더욱 깊어가고 사람들의 탈출구는 유흥과 향락이 차지한다.

따라서 허영만의 본질찾기는 더욱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 도박판의 세계(48+1)에 뛰어드는가 하면 당구(미스터 큐)에도 성공한다. 자동차로 세계를 제패한다는 '아스팔트 위의 사나이'와 '세일즈맨'에서는 자본 속으로 적극 융합하는 인간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트'에서는 풍요와 번영의 시대. 그 이면의 젊은이들의 방황과 갈등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아보려고도 한다.

이념과 집단의 80년대가 지난 90년대의 다양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조명은 허영만의 작품세계와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그가 주목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본질 찾기에서 한번도 현실 중심에 서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문제 밖에서 자기 내적 분열과 갈등 속에서 사라져갔다. 변칙복서처럼 현실을 냉소와 조롱으로 실컷 비웃은 뒤 슬쩍 물러나 앉았다.

지금 우리만화는 일본만화의 기교를 강요당하고 있고, 대중과 사회는 무분별한 성정 담론에 휘말리고 있다. 그 속에서 허영만은 카멜레온으로 또 본질을 찾아 길을 떠날 것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감성만이 충동한다. 난 그 감성에 따라가나."('비트'에서-민)

김헌식 <사회대 행정학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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