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출발지 함경도.

이러한 5백년 왕조의 출발지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함경도가 많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조선 사회에서 반역의 땅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7일 '함경도:왕실 발상지에서 반역의 땅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역사문제연구소(소장:김정기)는 함경도에 대한 지역 차별을 함경도의 지리적·역사적 특성과 중앙집권화의 부작용에서 찾고 있다.

조선 초기만 해도 함경도는 조선왕실의 발상지라는 배경과 국경지역이라는 이유로 토호세력의 지방민에 대한 지배를 용인하고, 비교적 낮은 세금을 부여하는 등 나름대로 혜택을 받지만 이후 태종 때의 조사의 , 세종 때의 이징옥, 이시애의 난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점차 조정으로부터 불신의 땅으로 각인되어 간다,

특히 이시애의 난은 함경도가 조선왕조로부터 반역의 땅이란 오명을 사게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먼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한 함경도 절제사 이징옥의 반란은 조선의 통치가 강화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세조는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하여 김종서 등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을 가진 이징옥을 김종서의 심복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려 했지만 미를 미리 감지한 이징옥이 난을 일으킴으로써 일어났다.

이징옥의 반란이 가능했던 요인은 함경도가 여진족과 백성이 함께 거주하는 국경지역이었고 세종 이후 영토확장이 이루어지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함경도 출신의 장수를 국방상의 요지에 장기간 복무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지 병력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징옥의 반란은 지방토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오히려 세조의 중앙집권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결과적으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는 데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후 세조는 함경도가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함경도 출신의 수령을 줄이는 동시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를 강화하게 된고 급기야 함경도 토반의 중앙진출을 억제하게 된다. 또한 현직관리에게만 지급되는 직전법의 실시와 지방민의 이주를 막는 호패법의 강화는 지방토호들이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정치는 농업생산성이 월등히 높은 경상도를 비롯한 하삼도와 경기지방 출신세력들이 주도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차별대우에 대한 이시애를 비롯한 함경도 토호들이 반발심을 가지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함경도는 지리적으로 북방에 위치해 있어 경제적 역경과 설상가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가렴주구를 견뎌내야 했으며, 조선 건국이래 취해오던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이 회유책으로 바뀜에 따라 귀화해 오는 여진족에 대한 경비를 부담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런 세조의 중앙집권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손실을 입은 지방토호의 불만과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 중앙 출신 수령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원성이 공통분모를 가짐으로써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세조는 이시애의 반란을 단기간 내에 진압하고 난 후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을 펼쳐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경도를 좌·우로 나누어 통치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의 근거지였던 길주를 길성현으로 강등시켰다.

결국 이시애의 반란으로 함경도를 비롯한 북부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차별이 한층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주민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정리:임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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