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가 동양을 식민화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바탕에는 서양의 반대 의미로서 '동양'이라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서·동이라는 이분법적인 서구제국주의 지식은 동양인을 못살고 게으르고 고루하며 구태의연해서 스스로 탐구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몰아붙인다. 따라서 아랍과 인도는 물론이고 중국, 조선에 대한 이들의 지배는 정당화된다.

이러한 정당화 과정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맹점도 여기에 있다. 동양에 대한 타자화로 시작해 결국 제국주의 침략이 당위성을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양을 서양의 이분법에 맞추어 다시 분화시키자면, '동양' 속의 '서양' 일본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넌센스를 최대한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강상중, 이산'의 글쓴이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도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원용하면서 일본의 식민정책과 동양학을 비판하는 글쓴이는 아직도 일본의 일부 어용지식인들로 인해 '일본판 오리엔탈리즘' 성행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후쿠타, 니토베 야나이하라, 시라토리 등으로 대표되는 오리엔탈리즘적 이항대립의 구도 속에 아시아가 타자로서 배제되었음을 부각시킨 것이다. 글쓴이는 동양에 대한 이런 일본식 식민주의 담론은 전후에도 계속되어 최근 일본에서 논의되는 '국제화 속의 일본문화론' 따위의 담론에조차도 여전히 스며들어 있다고 본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대안으로 사이드의 말을 인용, '비정착화와 탈중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유목민적 에너지로의 이행'을 탈오리엔탈리즘의 자리에 놓는다. 중심을 지향하지 않는 논의야말로 서유럽 중심의, 일본 중심의 타자화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사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자칫 애매모호한 논의로 흐를 수도 있다, 구체성과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무조건적 서양찬미'가 책에서 사이드의 사상이 짙게 배어 나오는 것을 보자면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역시 또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치부될 소지도 다분하다.

그런데도 글쓴이의 논지가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일본 근대학문 성립과정을 통해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을 해부하고, 동아시아 담론이 논의되던 중 일본의 타자화 담론을 경계했다는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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