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2천년, 새로운 밀레니움을 준비하는 현 시점에서 중대 신문에서는 '민중의 역사'에 초점을 맞춰 과거 1천년을 되돌아본다. 과거를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구분해 그 당시 민중의 삶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을 중심으로 민중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기술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민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한 19세기말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19세기초와 비교하여 조선사회에 살고있던 기층민들의 입장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사회였으나, 국내외적으로는 매우 심각한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삼정의 문란과 이에 따른 민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실시된 대원군의 개혁도 근본적으로는 농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뒤이은 민씨정권의 부패 타락한 정치는 조선민중들의 삶을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19세기중반부터 이웃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굴복하였고, 뒤이은 서양 제국주의의 동진(東進)에 일본이 대신하여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게 되었다(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제 조선은 몰락의 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담당한 지배층과 그 하수인들의 백성에 대한 수탈은 조금도 수그러질 줄 몰랐고, 이에 민중들은 생존과 함께 국권피탈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거족적인 항거에 직접 몸을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갑오농민전쟁이었다.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은 사도난정(邪道亂政)의 죄목으로 처형당한(1864년 3월 10일)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위해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면서 당시 농민들이 바라고 있던 사회변혁운동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이 모임은 당시 충청감사 조병식의 해산권유에 의한 일단 해산하였다가, 1893년 2월 11일 동학의 북접계가 주동이 되어 한양에 올라가 교조신원을 청하는 복합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고종에 의해 해산하게 되었다.

북접계가 복합상소를 올리는 동안 남접계의 서인주, 서병학 등은 척왜양의 벽서(壁書)를 미국인 학당, 교회당, 프랑스영사관, 일본영사관 등에 붙이면서, 만일 이들이 물러나지 않으면 3월 7일 무기를 갖추어 공격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이때 전봉준은 삼례에 머물면서 서인주 등의 한양 활동을 지지하고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진행 중에 있었다. 비록 3월 7일의 한양공격은 시도하지 못하였지만 이미 이때 갑오농민전쟁의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 고부는 당시만 해도 인근 고을 중 가장 부유한 고을의 하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부임이래 각종 탐학을 일삼았고,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전봉중이 써준 등장(等狀)을 가지고 고부관아에 가서 항의하던 농민들을 조병갑은 구타, 구금하였다. 이후 임기가 끝난 조병갑은 1893년 11월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자 전라감사에게 뇌물을 주어 고부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었다(1894년 1월 9일).

조병갑의 재부임을 들은 전봉준은 1894년 1월 10일 저녁, 군중들을 말목장터에 모이게 한 후 이들을 이끌고 고부관아로 달려가 11일 아침 관아를 점령하고, 25일 백상으로 물러나 진을 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고부민란'으로 갑오농민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이다. 정부는 당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고부민란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 이용태는 고부에 도착한 후 조병갑의 처사만을 정당한 것으로 판결하고 민란의 주모자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고부고을을 이잡듯이 뒤지면서 무고한 농민을 동학이라 트집하여 재물을 수탈하였다.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등과 의논하여 무장에서 4천여명의 농민군을 모아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의 이름으로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하고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본격적인 농민전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1894년 3월, 제1차 농민전쟁).

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을 출발하여 23일 고부를 점령하고, 25일 백산에 진영을 설치한 후 '농민군 4대강령'을 선포하였다. 이때 참여한 농민군의 수는 약 8천여명이었다. 정부에서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군대를 인천항을 통해 군산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농민군은 3월 29일 태인을 점령하고 원평으로 진격하던 중, 관군의 남하소식에 다시 태인방면으로 향하였다가 4월 7일 새벽에 황토현에서 처음으로 관군과 조우하여 승리하였다. 이날 홍계훈은 정부군을 인솔하여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공격하여 그날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이후 전주성을 에워싸고 관군과 수차례의 접전을 벌이다가, 5월 4일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화의의 뜻을 전하자, 5일 홍계훈의 협상용의 답변과 함께 6일에 화의가 이루어져 7일 이른바 '전주화의'가 성립되었다.

전봉준은 화의 이후 '폐정개혁'27개조(현재는 국내문제에 치중된 14개조만이 전한다)를 선포하고 이를 실시하기 위하여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점령한 군현의 민정을 처리하기 위한 농민의 지방통치조직이었다. 폐정개혁의 내용은 전결세·환곡·잡세·수세 등의 부담경감, 소상인을 억압하는 수탈과정의 시정, 탐관오리의 숙청, 고치래 폐지, 민씨 척족정치의 척결 등을 내용으로 하며, 농민군들의 이 요구는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였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을 즈음 정부의 요처에 의하여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도착하였고(5월 12일), 그 직전 일본은 청과 합작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였고, 이를 반대한 청군을 배제한 채 경복궁을 무장침입하여 민씨정권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옹립하였다(6월 21일). 이것은 일본군의 조선주둔 명분과 청과의 전쟁을 통하여 조선침략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어 6월 23일 일본은 풍도에서 청군의 함대를 예고없이 공격한 후 7월 1l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청일전쟁). 청일전쟁은 세계 열강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나고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는 병자수호조약의 제1조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속셈이었다.

일본군의 궁궐침범 소식을 들은 전봉준은 9월 12일, 일본군을 축출하고 봉건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제2차 봉기를 감행하였다. 전봉준은 삼례에 본부를 설치하고 농민군들의 삼례집결을 호소하였으나 동학의 북접계와는 여전히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때 의도로 '벌남기'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결국 중도파의 화해주선으로 타결점을 찾고 남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9월 하순 남북접연합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정부에선 토벌군을 구성하여 남하시켰으며, 각 방면으로 남하한 토벌군이 농민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공주에 도착한 것은 10월 24일과 27일 사이였다. 일본군도 10월 15일, 3대로 나누어 용산을 출발하여 서로분진대는 10월 24일, 종로분진대는 29일 각각 공주에 도착하였다.

북상한 농민군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공주의 경천에 진을 치고 관군과 전투를 시작하였다, 10월 23일 이인전투에서 농민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25일의 곰치전투에서는 농민군이 많은 손실을 입었다, 농민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11월 8일 공주를 향해 진군하여 9일 농민전쟁의 최대 격전지라 할 수 있는 우금치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대와의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 1만여명중 5백명 정도만 살아남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으나 결국 농민군은 참패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태인으로 후퇴한 후 다시 농민군을 규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농민군의 해산을 명하였다. 이외 각지에서 활약하던 농민군들도 속속 일본군과 관군에 패배하여 해산을 하게 되었고 결국 12월을 고비로 농민군의 전쟁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농민군의 패배 이후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전쟁의 진압, 잔당의 색출이라는 명목하에 호남에 진입하여 농민군은 물론 무고한 양민들을 무차별 체포, 학살하였고 마을을 불태우거나 부녀자들을 능욕하였다. 각도의 피해자들은 거의 30만~40만 명에 달하였고, 동학군의 재산은 모두 관리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갑오농민전쟁의 실패는 전쟁기간 동안 쌓아올린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일본군과 관군의 학살, 파괴로 좌절되었다는 것을 의미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예견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전쟁은 조선 5백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농민의 힘(전쟁)을 바탕으로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권력을 집행하고 경제를 재분배했다는 점에서(비록 호남과 그 인근지방만을 중심으로 거행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비록 농민전쟁은 반농민적이며 보수연합세력에 의하여 패배로 종결되었지만, 그 패배는 패배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다. 즉 갑오농민전쟁을 밑거름으로 조선정부는 그것이 자주적이던 타율적이던 개혁을 하지 않으면 지탱하지 못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곧 타율적인(일본의 입김에 의한) '갑오개혁'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은 반봉건을 지향하여 근대민족사회의 길을 열어 놓았던 반면, 갑오개혁은 그러한 농민군들의 욕구를 묵살한 채 타율적으로 진행되어 한민족 이후 역사에 큰 부담으로 남게되었다.

박순 <문과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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