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힘겹고 지리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니만 그런 바램은 대개 '현실'이라는 속박에 매여 용기 없는 자의 한숨으로 묻혀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가을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어, 낙엽이 떨어지는 지리한 오후 이름모를 행선지가 적힌 버스를 타게되고 차창 밖을 스치듯 지나가는 가을 풍경에 감탄하는 추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바로 그 이야기가 가을 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다.

'작가와 떠나는 가을 여행.'

'맑은 책집'이 매년 이맘쯤 마련하는 '작가와 떠나는 가을 여행' 의 이번 주제는 '안성의 미륵을 찾아서'로 테마카페 '인도로 가는 길'을 경영하는 조천호씨와의 공동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산적처럼 생겼지만 시인입니다"라고 수줍게 인사하는 시인 신동호씨와 함께 했다.

지난 3일 하늘이 열렸다는 개천절날 마음도 활짝 열 준비가 되어 있는 스무명의 학생이 2캠 교사동 앞 민주광장에 모였다. 하지만 교통문제로 1시간 가량 일정이 늦어졌고 신동호 시인과도 첫 목적지인 '쌍미륵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쌍미륵사에서 일정을 마친 후, 커다란 돌모자에 물결무늬 부드러운 옷을 입고 약간 어색한 듯 서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모습이 다정스러웠던 쌍미륵불을 뒤로하고 국사암으로 향하는 조금은 힘든 산행길에 올랐다.

산길에서 자그마한 산밤들이 누가 일부러 놓고 간 듯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 웃음을 자아낸다. 이윽고 가파른 포장길이 눈앞에 펼쳐졌고 이내 국사암에 도착했다.

낯선 절에서 어디서 뵌듯한 분위기의 스님을 만났다면 그것도 전생의 인연일까. 일행에게 더없이 따뜻하시던 주지스님이 "종교가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돼. 기독교인이 절에 갈 수 있는 것도 복이고 불자가 교회에 갈 수 있는 것도 복이야"라는 말씀이 깊이 새겨진다. 무엇보다 스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 기독교 신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멘"이라는 말에 웃음 때문에 기억에 깊이 남았음이리라.

주지스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 것은 국사암에 있는 세 개의 미륵을 본 순간이었다. 미륵의 코가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미신 때문에 코가 거의 없는 세분의 미륵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몽고양식의 모자가 아니던가.

가운데 불상을 중심으로 양옆에 있는 것이 문관과 무관으로 추측되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가운데 미륵불이 궁예가 아닐까 한다는 조천호씨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때쯤 어느덧 해가 중천에 있어 다음 일정을 준비해야 했다. 석가모니의 태몽과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했다는 국사암의 벽화와 작별을 하고 난 뒤, 무엇보다 미륵의 웃음을 간직한 국사암 주지스님과의 이별이 안타까워 어설픈 합장을 해본다.

산에서 내려와 된장찌개로 시장끼를 달랜 일행이 찾은 곳은 죽주산성. 아담한 산성을 둘러본 뒤 다같이 앉아 신동호 시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본다. 그는 그의 시 '가을'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벌판의 불씨는 좀처럼 꺼지지 않고/묵은 낙엽위로 또 다시 낙엽은 떨어져/떡갈나무 숲은 여전하다/가을 벌판에 그대로 몸을 누인다/이렇게 편히 누워도 되는 것일까"라고.

죽주산성의 가을은 깊어, 일행 곁에 다시금 떨어질 듯한 낙엽은 고즈넉하다. 뒷편에 심어져 있는 갈대와 도토리 나무를 치는 둔탁한 도끼소리가 가을의 서정을 더한다.

죽주산성에서 가을을 한껏 머금은 일행이 찾은 곳은 죽산면 미륵당. 미륵불은 유교식 사당안에 모셔져 있다. 죽산면 주민들이 칠월칠석과 추석에 이곳에서 제를 드린다는 말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짐은 무슨 이유인지 친근하기만 하다.

제법 쌀쌀해진 저녁 기운을 느끼며 일행은 홍명희의 저작 '임꺽정'의 배경이 된 칠장사를 찾았다. 일곱도둑이 절에 침입했다가 감화되어 일곱 현인이 되었기에 칠장사라 불린다는 이곳에선, 마이크를 들고 강의하는 주지스님의 설명 덕택에 인목대비가 영창대군과 그녀의 부친 김제남을 기리는 의미로 원절로 삼았다는 역사도 접할 수 있었다.

시간은 왜이리 빨리 가는지. 칠장사를 구경하고 청룡사로 가는 짧은 시간 어둠이 내리고, 밤하늘엔 별이 조금씩 빛났다. 일행은 시간이 늦어 청룡사의 닫힌 문을 바라본 채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차속에서 종교의 포용성을 말하던 국사암 주지스님과 투박하지만 몹시 따스한 미소를 가진 미륵불의 미소를 생각하며, 우리가 잃고 있었던 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더불어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일행 모두의 추억이 미륵불의 온화한 미소가 함께 맑은 가을하늘처럼 기억되기를 희망해 보았다.

<홍윤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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