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염이 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언어습득 자체가 전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다. 인간 대 인간의 교육에서, 각종 선전 문구에서, 우스갯소리에서, 심지어는 사랑의 고백에서도 이 언어의 전염적 속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것은 미생물에 의한 전염처럼 전적으로 인간에게 악영향만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전수자의 의도와 전수 내용에 따라 감염자들은 타락하기도 하고 고양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식이 비슷한 언어 습관을 갖게 되고, 부부나 친한 친구들의 말이 닮아 가는 것을 보면 언어의 전염이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변에서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새로운 용어나 어구를 만들어 낸다. 이런 경우 별 개념 형성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따라 하게 되고 결국은 전염자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얼마전 어떤 사람이 무슨 내용에든지 '총론적으로 말하자면'과 '각론적으로 말하자면'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을 자주 들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언어의 전염성이라는 것이 무서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 유용하면서도 정확한 설명을 해 주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전염자 자신들도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개념들을 유포하는 경우에는 그걸 접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병에 빠지게 된다. 비판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현학에 빠지게 되고, 이 때문에 진리를 들여다 볼 경로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현상들은 인문 분야에서 많이 보이는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등장 한 많은 의미 없는 개념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문제는 면역성이다. 면역 체계가 잘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해로운 언어들에 쉽게 감염되지 않는다.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언어에 대한 적절한 방어체계가 갖추어져 있어서 쉽게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외부의 영향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습관적으로 남을 모독하는 이, 입에 남에 대한 험담을 달고 다니는 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고, 남의 의견은 항상 무시하는 듯한 말로 일축하는 사람, 앉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사람 등 악성 전염병의 종류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 전염병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자각증세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언어가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무방비로 외부의 병인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나, 타인이 쉽게 자신을 조종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언어 습관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비판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루아침에 악성 습관을 치료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이 무엇에 감염되어 있는지나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찬규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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