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지금 프랑스 지성계는 미국의 뉴욕 주립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알랭 소칼과 벨기에 루뱅 대학의 장 브리크몽 물리학 교수가 함께 지난 10월 1일에 불어로 내놓은 신간 '지적사기'의 혹독한 비판을 맞이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현재 프랑스의 사상계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1급의 지성인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을 지독한 언어 유희로 과시함으로써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학문의 신비화를 꾀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인 이들은 주로 수학이나 물리학 같이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적 용어들의 개념을 최소한의 경험적 정당화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프랑스 언론들도 앞다투어 '지적사기'와 관련된 논쟁이 함축하는 시대적 파장의 효과를 예측하고 진단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 책의 출간은 전후에 새롭게 등장한 현대 사상의 총아로 불리운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문화적 다원주의를 재평가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프랑스 진영의 학자들의 태도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을 옹호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사기꾼으로 내몰린 당사자들의 심정은 벼랑 끝에 선 기분일 것이다.

필자 역시 '지적사기'라는 책의 내용을 전부 다 알지 못한 채 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잘 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과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개념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점에 동감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현대의 문화적 측면과 관련해서 소칼 교수가 제기하는 '지적 사기'에 전체적으로 동조할 수 없는 몇가지 중요한 쟁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소칼 교수의 지적대로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작성된 담론과 그에 동반하는 지적인 부정직이 지적인 삶에 독약을 주입하고 있으며,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반지성주의를 강화시켜 주는 것" 이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문제가 없는가. 문제가 있음이 제대로 지적된다면, 그들의 주장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이 틀림이 없다. 문제를 하나 하나 따져 보자.

첫째, '지적사기'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 정신의 도래를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지적인 부정직의 소산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오히려 포스트 모던한 시대 정신은 근대의 총체성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인식 주제와 인식 대상간의 일치를 진리라고 설정했던 근대 철학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때 '지적사기'는 이러한 역사적 통찰을 간과했다는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점은 인문학의 위기라 일컫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즉 인문학에서 적용되는 진리 개념을 과학이나 수학에서 적용되는 과학적 진리로 환원해 생각하려는 시도는 이미 근대의 데카르트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근대 철학은 '주체'라는 범주의 선험적인 출발에서 시작해 절대적 진리에 이르려는 과정이라 한다면 포스트 모던한 탈근대의 철학에서는 지식은 주체를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담론(談論)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지식은 그것이 참이든 거짓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효과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근대와 탈근대에서 생각하는 주체와 지식의 관점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한편 우리의 지식을 참인 것으로 간주하는 정당화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둘째. 해체 이론을 다루는 포스트 모던한 시대 사조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던 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굳이 푸코나 데리다, 보드리아르 라캉 등을 거론하지 않고도 이들이 나름대로 일반 독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학문의 대중화를 위해서 자신들의 이론적 사고를 실천적 안목에서 행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나, 배운 사람만이 근엄하게 가질 수 있는 고답적인 사유의 철학에 대해 대중들이 외면을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근대적 사유의 정점이랄 수 있는 합리성이라는 기준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푸코가 '정신적인 권력'의 개념에 대해 관계를 폭로하여 인간을 모든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계보학적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는 광인이 타자(他者)로서 배제되는 경계는 사실상 어떠한 과학이나 진리에 의해서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광기는 문화의 소산이며, 서구 부르조아 문명의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문화의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남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이성적 사고 방식이 갖는 한계를 푸코의 눈을 통해서나마 현대인들이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볼 수 있었 던 것은 결코 우연적인 귀결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적사기'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애매모호성에 대해 비평의 길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생각해 볼 것 같으면, 그들은 포스트 모던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모호한 경계선 상의 안과 밖에서 자유스럽게 넘나들고 있다는 생각의 기능성을 열어 두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은 '문화'의 관념을 산출하는 집합 장치, 즉 기준들의 다원성으로 말미암아 서로 상이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화의 다원적 특징을 엄밀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방법의 정립이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와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서로 다른 개념들, 방법들, 이론들을 과학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적합성의 기준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의 주목을 이끄는 신작 '지적사기'가 포스트 모던 논쟁을 일거에 종식하겠다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는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투영되어 있는 포스트 모던의 여러 가지 조건들은 '해결'의 차원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마음의 문제에서 풀 수 있는 '해소'의 차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박만엽 <문과대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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