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맞아 또 다시 지역론이 불거져 나왔다. 이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시급히 개선 되야 할 문제로, 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개선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제28기 한국사 교실 '정치 권력에 찢겨진 지역차별의 역사'를 마련하였다. 이에 중대신분에서는 4회로 나눠 한국사 교실을 연재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한반도 중부 서해안에 접한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470년과 조선 건국후 1405년(태종 5년)에 한양천도가 단행되기 정까지 두나라의 도읍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개성지역은 신라하대에 이르러 예성강 이북지역의 개발과 궁예의 후고구려 천도 후 신라의 변방에서 반도의 중심부로 바뀌어 갔다.

고려를 개국한 왕건은 서울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고 송악과 개성 두 군을 합병하여 개주라 불렀다.

개성은 통일신라시대 전통문화의 중심지인 동경(경주)과 새롭게 개척해 나아가는 북방의 서경(평양) 사이의 중심지로서 발전해 갔다.

13세기말 고려의 수도는 몽고의 침략으로 임시구도로서 강화로 선도하게 되었다.

개성에 멀지 않은 섬이었고, 또한 섬이 커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물자를 어느 정도 자급할 수 있다는 잇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화로 천도하게 된 주된 이유는 수건에 약한 몽고의 기마병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강화도는 40년 동안의 대몽항쟁의 중심지이자 고려 서울이 되었다.

강화도로 피난해온 고려의 임시정부 40여년동안 몽고로부터 지탱할 수 있었던 원인은 전국의 조세를 해상을 통한 조운으로 식량등 생활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뭍에 있는 백성들은 봉고군의 침략과 약탈아래 내던져진 꼴이되고 말았다.

이후 고려말기에 들어 도참사상을 근거로 개성의 지기가 약해지고 있다고 하여 한양 천도가 몇차례 논의되었고 1387년(우왕 13년)에는 천도를 위해 한양 산성의 축조가 논의되고 , 이듬해 봄에 대대적으로 수축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되었다.

한강유역은 삼국시대부터 경제적 위상이 높아 수륙교통의 요지로 지정학적 위상이 매우 높아왔다.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공이 많았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 후 정권과 군사권을 쥐고 사전을 개혁하여 권문세족의 옛 경제질서를 허물어뜨리고 신진사대부를 위한 새로운 경제질서를 확립하였다.

1392년 새왕조를 연 태조는 미처 나라 이름을 정하기도 전에 한양천도계획부터 추진하였다. 한양은 고려 숙종때부터 남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태조가 천도문제를 서둔 데에는 새 도읍에서 새 정치를 하여 민심을 새롭게 하려는 의도말고도, 지덕이 쇠잔한 망국의 땅 개경을 피하려는 풍수사상의 영향이 컸으며, 구신 세족의 정치적 기반에서는 역성혁명을 한 임금이 정치를 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 때까지는 개성이 한성과 더불어 수도로서 기능을 하였다.

사회발전에 따라 서울과 지방의 관계는 변화해 왔다.

고려시대 수도 개성은 왕족과 관원층의 거주지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동경(경주), 서경(평양) 별도 관원을 두어 차등관리 했으나 이들의 위상이 점점 격하되자 이곳에서 반란이 나기도 했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 후 고려의 수도 개성은 유부수로 바꿔 준 지방 도시로 격하되었으나 개성 주민에 대한 제도적 명시적 차별을 가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울(수도)의 관원층과 지방의 향리층으로 구별 편제한 체제에서 지방에 대한 질적 차별이 해소되는 체제가 정비되면서 서울은 물론 다른 감영(또는 계수관)에 대하여 그 특권을 상대적으로 박탈 상실당했다고 볼 수는 있다.

조선은 고려 때와는 달리 관원과 같은 지배층인 호족이 적국의 모든 군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여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8도 감영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갔다.

(정리: 임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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