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오는 2천년, 새로운 밀레니움을 준비하는 현 시점에서 중대 신문에서는 '민중의 역사'에 초점을 맞춰 과거 1천년을 되돌아본다. 과거를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구분해 그 당시 민중의 삶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을 중심으로 민중의 삶과 시대적 상황을 기술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민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19세기는 조선왕조를 지탱해 온 사상체계인 성리학이 기층민들에게는 물론 사대부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사회의 기본적인 제도였던 신분제도와 봉건적인 경제제도가 급격히 붕괴되는 시기였다.

때문에 비록 제국주의의 침탈이 없었다 하더라도 머지않아 조선왕조는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며, 붕괴에 박차를 가한 사건이 1811년의 홍경래 난과, 그 영향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민란들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민란의 단초를 제공한 홍경래의 난은 그 준비기간에 비하여 너무 빨리 종결되기는 하였지만 그 파장은 조선왕조에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안긴 사건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홍경래 난의 준비기간은 10년이 아닌 훨씬 오랜 시간을 두고 예견되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홍경래 난의 발생 훨씬 이전부터 쌓아온 백성들의 불만이 홍경래 난이라는 외형을 빌어 표출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며, 홍경래 난이 없었다 하더라도 필경 다른 형태로 그 불만이 표출되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사회의 저변을 이루는 계층은 양반지배층이 아닌 농민층들이었고, 농민층들은 왕조의 모든 세원(세원)의 근원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국초부터 형식적으로나마 정책적으로 항상 농민을 위하였고, 결과를 제쳐두고라도 정책적으로 항상 농민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양반지배층들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확립과 농민의 보호라는 두가지 목적을 위하여 일찍부터 농법의 개량, 농서의 간행 등을 통하여 농업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전 왕조인 고려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인 이앙법의 보급은 농업생산력이란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토지의 생산성이 증대되어 모든 세원이 토지에 집중되었고, 광작운동에 따른 경영형부농의 등장을 비롯하여 자본주의의 맹아로 볼 수 있는 각종의 새로운 경제형태가 하루가 멀다하고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경제형태들은 농민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강요하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농업생산력과 반비례하여 농토에서 유리되는 농민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이앙법은 단위면적당 노동력의 70∼80% 정도를 감소시켰고, 이에 따라 농업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전호층들은 하루아침에 경작지를 상실하고, 생계를 위하여 일부는 농업임금노동자로, 일부는 도시나 광산으로 스며들어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시빈민층을, 때로는 도적의 무리로 변하여, 농민층의 분해라는 커다란 사회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초에 이미 농토를 잃은 무전농민의 수가 삼남지방에서만 10만이 넘었다는 것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지배층의 양반측들도 극소수의 가문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일반 하층민들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경우도 흔하게 발생하였다. 신분적인 우위는 가난앞에서 허구의 것으로 변질되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농민이나 상민, 심지어는 노비나 고공층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자연재해가 거의 매년 발생하여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1809년, 1811년의 대흉년과 1822년의 콜레라의 발생은 조선백성들의 생존을 위한 하층민들의 투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소극적인 저항으로는 1804년 서울에서 발생한 관서필기 사건, 안악에서 발생한 정부비방가사 등이 있었으며, 비교적 적극적 가사 등이 있었으며, 비교적 적극적인 저항으로는 명화적, 서강단, 폐사군단, 채단, 유단 등 조직을 가진 도적들의 출현이며, 매우 적극적인 저항으로는 이른바 민란으로 표출되었으니, 그 단초가 된 사건이 1811년 3월 황해도 곡산민란과 뒤이어 발생한 홍경래 난이라 할 수 있다.

홍경래 난을 주도한 인물들은 용강의 몰락양반 홍경래, 가산의 풍수인우군칙, 태천의 김통용 등이 핵심인물이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앞세워 평안도 지방의 향임층, 무임층 등의 부농들과 송상 등 사상들과 결합하여 가산의 다복동을 반란을 계획하였다.
때바침 평안도 지방의 흉년으로 기만들이 대량으로 발생하자, 광산을 채굴한다고 하면서 이들을 모아 반란을 계획하였다. 거사날짜는 1811년 12월 20일로 정하였으니 그 준비기간이 무려 10년이었다.

거사계획이 선천부사 김익순에게 발각되자 날짜를 12월 18일로 앞당겨 군대를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양분하여 거병하고, 이후 곽산, 정주, 박천을 점령하였으나 안주와 영변의 공격 순서를 두고 지도층간의 내분이 발생하였다. 21일 다시 다복동으로 일단 회군하였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27일까지 가산, 박천, 곽산, 정주, 희천, 선천, 철산 등지를 점령하였으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거사의 성공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니, 작전의 지연으로 다른 지역과의 내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평양감영이 중심이 된 관군은 29일 에야 홍경래군과 처음으로 박천의 송림리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는 관군의 승리로 끝나 홍경래군은 근거지인 다복동과 박천을 상실하였고, 이후 관군은 초토전술을 쓰면서 홍경래군을 정주성으로 몰아넣었고, 관군의 초토전술을 피해 농민들도 함께 정주성으로 밀려들어가고 말았다.

정주성에서 관군과 홍경래군의 대치는 비교적 홍경래군이 우세하게 전투를 주도할 수 있었으니, 이는 관군에게 인적, 물질적 손실을 당한 농민들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정주성에서의 우세한 전투력도 거사 초반의 광산노동자들이 아닌 관군에 밀린 농민들의 전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관군은 정주성 안의 군대보다 4∼5배정도 많은 숫자였으나 그 사기는 매우 저하된 상태로 정주성을 포위하고 있었고, 결국 전투의 승패는 관군과의 접전이 아닌 내부의 분란과 식량부족 때문에 관군의 승리로 귀결되고 말았다.

1812년 4월 3일, 관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16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결국 4월 19일 정주성은 함락되고, 홍경래 난은 봉기한지 1백 19일만에 실패로 끝을 맺게 되었다. 당시 성안에는 여자와 10세 미만의 아이를 제외하고 모두 1천9백17명의 장정이 있었는데 이들은 23일에 모두 참수되고 말았다.

난의 실패원인을 지금에서야 따져보는 것이 허망하기는 하지만 구태여 그 이유를 들어야 한다면 우선적으로 하층농민층들과의 유대가 부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구성원의 주류가 잔반층, 지식인층, 하층, 관료층으로 구성되어 성격상 처음부터 농민층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그들도 농민들에게 어떤 희망적인 강령을 제시할 수 없었다.

난의 초기에 청천강 이북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난을 주도적으로 담당한 부농층들이 지닌 청천강 이북지역에서의 영향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r 기간이 불과 한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일이었다.

이러한 점을 극명히 보여준 것은 정주성에서의 4개월에 걸친 항쟁이었다. 관군들은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북상을 하던 중도에서 이른바 초토전술을 사용하면서 북상하였고, 이에 쫓긴 농민층들은 관군을 피해 정주성으로 집결하였고, 이들이 정주성의 방어와 관군에 대한 공격을 주도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것은 홍경래군이 처음부터 농민층들과 결합하지 못하고 불리한 상황에서야 농민층들과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농민층들의 저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라고 할 이다.

실패의 또 다른 원인으로서는 애초부터 지방색을 지닌 반란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창시가 지은 격문에서 이미 관서지방의 차별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있으며, 홍경래군의 구성원도 지도층의 90% 이상이 평안도지역의 인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향이 충분히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이 지역출신의 시인 김소월은 그의 시 '물마름'에서 홍경래 난의 실패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의 민란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혁명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관서지방의 차별화에 대한 홍경래와 그 주변인물들의 개인적인 불만에 의한 반란이 아닌 조선왕조의 해체기에 발생하여 왕조의 붕괴에 박차를 가한 민란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농민들은 봉건정부의 일방적인 수탈에 저항할 수 있는 의식의 싹을 키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농민층들은 항조운동을 시작으로 점차 무력항쟁으로의 길을 걷게 되며, 그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민중들의 움직임에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1860년대의 임술민란과,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된 익산, 함평, 개령 등 전국 70여 개 곳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갑오농민전쟁의 정신적 원류가 되었다는 점에서 홍경래 난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박순<문과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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