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장원-김금비 학생(동덕여대 문예창작과) <세입자를 위한 아침>

문예창작전공과 중대신문이 주관하는 ‘제31회 의혈창작문학상’ 공모가 진행됐습니다. 의혈창작문학상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청년 문학도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데요. 시와 소설 부문으로 나뉘며, 전국의 전문대 이상 학부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소설 부문 1편이 당선됐는데요. 김금비 학생(동덕여대 문예창작과)의 <세입자를 위한 아침>을 만나봅시다.

 

세입자를 위한 아침

사진 김수현 기자
사진 김수현 기자

  이모부가 설명하는 컨티넨탈 브렉퍼스트란 이런 것이었다.

  네모반듯한 트레이 위에 매일 아침 갓 구운 빵이 담긴 바구니와 따뜻한 스프, 다양한 과일이 올라간 그래놀라 시리얼 요거트, 잼과 버터가 놓인다. 빵과 스프는 재료 수급 현황에 따라 매일 변경되며 과일 역시 그날 아침 공수해온 신선한 과일 두세 가지가 잘게 썰려 구성된다. 음료는 오렌지 주스와 최고급 원두를 사용한 드립 커피 중 선택이 가능하며 단단한 사기그릇은 전부 서울 5성급 호텔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브랜드의 제품이라는 것도 빼놓지 않고 언급된 사항이다. 빵이 담겨져 나오는 바구니 또한 하나에 5만원을 호가하는 고가 상품이라고 했다.

  물론 유럽식 아침식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한식도 있다. 코리안 브렉퍼스트라는 이름의 식사는 컨티넨탈 브렉퍼스트보다 1000원 더 비싼 7900원으로 생생전복죽과 미소 된장국, 깍두기, 수란이 함께 나가며 요거트와 음료는 동일하게 제공된다. 모든 식사는 몇 번의 방송 출연과 <나의 아침식사 이야기>라는 책 저자로 이름이 알려진 오셰프의 총괄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a 아파트 거주민이라면 누구나 이 특별하고 정갈한 호텔식 식사를 아파트 내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이모부의 야심찬 새 사업계획이었다. 봉씨 성을 가진 충남 출신의 봉주르 이모부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50대였는데 몇 년째 컬이 들어간 단발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유러피안 같은 이모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봐 수련아. 더 이상 집에서 음식을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이미 유럽은 그런 생활 습관에 익숙해져 있지. 런던 사는 폴도 그래. 저기 파리 마레지구 사는 줄리도 동의할 거야. 자신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거야. 이 사람들의 주방은 늘 깨끗하고 향기롭지. 엄마들은 더 이상 아침마다 자질구레한 반찬을 차리고 밥을 지을 필요가 없어. 한데 문드러져 썩어가는 음식물 쓰레기를 치울 필요도, 기름이 눌러 붙은 후라이팬을 씻을 필요도 없다고. 아파트 조식 서비스를 통해 삶이 얼마나 윤택해지는지 다들 곧 알게 될 거야. 그래, 아직은 메뉴가 두 개뿐이야. 시범기간이거든. 어느 정도 이용자 수가 고정이 되면 메뉴를 늘릴 것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이 아파트 단지 내 사람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것이라고 이모부는 말했다.

  브로슈어에 실릴 홍보 문구를 제작하듯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해 자신의 사업을 소개하던 이모부는 말이 끝난 뒤 약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는데, 뭐랄까 강한 의지에 찬 눈빛이 반짝여 나도 모르게 신뢰가 간 달까. 이 사업에 동참한다는 것이 뿌듯해졌다. 나는 이제 막 수능이 끝난 열아홉이었고 스무 살을 앞두고 있었지만 대학교 입학까지는 3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나 같은 풋내기는 어떤 아르바이트에서도 써주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 경력을 쌓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걸로 면접을 대신해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눈앞에 펼쳐질 세계가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 아직은 모를 때였다.

  식당은 아파트 내부에 별도로 위치한 지하 커뮤니티 센터에 있었다. 2500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 전부와 연결된 커뮤니티 센터는 사우나, 헬스장, 골프 시설, 어린이집 및 독서실 등등을 겸비한 곳으로 거의 모든 주민들이 오가는 만남의 장 같은 시설이었는데 봉주르 이모부가 사우나와 헬스장 사이에 놓여 어느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지 않던 연회장을 식당으로 개조하는 독창적인 생각을 해낸 것이다. 이모부는 a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동 대표를 맡고, 세 번의 입주민 회의 끝에 연회장을 차지했다고 이모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한다면 하는 충남 남자지, 그이는. 평당 1억짜리 아파트 동 대표에 얼마나 쟁쟁한 후보군들이 즐비했는지 아니?”

  연회장 특유의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와 오래된 벨벳 커튼 같은 것들 때문에 일반적인 식당과는 느낌이 달랐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것들이 아파트 조식 서비스의 프라이빗함을 극대화 시켜주었다. 나는 엄마가 새로 산 트랙 스니커즈를 신고 연회장을 둘러보며 역시 이모부는 다 계획이 있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새로운 네이버 카페에 가입한 뒤로 해외직구에 빠져 있었다. 백화점에서 미리 입어보고 해외 사이트에서 주문하면 절반이나 저렴한 가격으로 옷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열두 자짜리 붙박이 옷장을 가지각색의 옷들로 꽉 채우고 있으면서도 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멋쟁이였고, 다소 돈이 부족한 게 흠이었으므로 해외 직구라는 새로운 방법은 정말이지 안성맞춤이나 다름없었다. 백화점 3층 해외 의류 매장들의 값비싼 티셔츠와 원피스들이 옷장을 가득 메웠다. 엄마 또래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줌마들은 ※ 얼른 달려가세요! 한 피스 남음 ※ “225 신는 신데렐라 찾아요” 같은 글을 올려 핫한 소식들을 공유했고 전 세계에서 날아온 택배들이 하루 걸러 하루 꼴로 현관문 앞에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영어로 집 주소를 번역해주거나 새로 발굴한 사이트의 회원가입을 도와주는 대가로 엄마가 산 옷이며 신발들을 슬쩍슬쩍 가져다 입곤 했다.

  브랜드의 옷들은 때깔부터 달랐다. 영등포 지하상가, 그러니까 스트릿 출신 옷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였다. 엄마는 카페 벼룩으로 15만 원에 구매한 38만 원 짜리 셔츠를 입고 이 한 끗이 얼마나 사람을 있어보이게 만들고 또 옷 한 뼘 만큼의 기장이 어떻게 사람을 빈티나 보이게 만드는 지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전엔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던 엄마의 옷장을 공유하게 된 이후로 엄마가 그토록 추구하던 아름다움의 세계를 깨달아 버렸다. 그리고 세상에 얼마나 많은 카피들이 존재하는지, 심지어 백화점 1층 매장 중저가 브랜드의 옷들도 결국엔 디자인 카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무거나 주워 입던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나는 그 한 끗의 차이를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백화점 매장 안에서 자주 망설이던 엄마는 휴대폰 너머의 크고 작은 가격들엔 거침없이 카드 숫자와 cvc 번호를 입력했다.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엄마의 사치스러운 면모들이 좋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정말 있어보여서 이기도 했고 엄마가 즐거워보여서 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것은 비싸고 비싼 건 그 값을 한다는 것이 엄마의 모토였다. 새로 온 택배를 뜯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옷태를 살피는 158cm의 자그마한 뒷모습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엄마는 중고 물건에도 서스럼 없어졌다. 일산까지 차를 몰고 나가 샤넬 클러치를 직거래해온 적도 있었다. 아기 엄마가 백화점에서 직접 구매한 건데 출산 후 쓸 일이 없어져 싸게 내놓은 물건을 잘 건졌다고 했다. 아이폰을 사용한 지 일 년이 지나도 타자에 익숙하지 못하던 엄마는 가장 먼저 댓글을 달아 살 수 있었다며 휴대폰 화면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클러치는 모서리가 조금 까져 있었고 광이 죽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느낀 것들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 중고 클러치는 엄마가 마흔 아홉에 처음으로 가진 샤넬 가방이기 때문이었다.

  식당 일은 녹록치 않았고 비가열 식품들로 최대한 “있어 보이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는 아파트 주민들의 아침과 점심을 책임지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나 7호선 반포역에 내리는 일에 금세 적응해나갔다. 출근해 홀 바닥을 쓸어내고 빵바구니에 들어갈 생지들을 오븐에 넣어 굽고 냉동된 스프를 실온에 해동한 뒤 보온 디스펜서에 넣어 치킨 스톡 몇 방울과 함께 버무리면 8시였다. 마지막으로 테이블을 한 번씩 닦아 훔치고 요거트에 들어갈 그래놀라와 시리얼을 통에 넣어 섞으면 유리문 너머로 냄새를 맡은 주민들이 하나 둘 비척비척 걸어 들어왔다. 그러면 주방 안의 직원들은 이모부가 받아내는 주문들을 듣고 즉각즉각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내어놓았는데 그 일을 몇 차례 하고 나면 그릇이며 수저들이 부족해져 홀에 나가 사람들이 먹고 난 트레이들을 다시 들여와야 했다. 나는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저들을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빼 린넨으로 닦는 일을 반복하며 이모부가 누누이 말하던 8720원의 기쁨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중에야 그런 호텔 조식 아르바이트는 보통 만 원 이상의 시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최저시급을 받고 일하면서도 나는 그런대로 즐거웠다. 새로운 공간에 놓인 내가 신기했고 홀 뒤쪽의 작은 식당은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한 사회생활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껍질이 들어가지 않게 계란 까는 법을 배웠고 석류 알갱이 겉에 붙은 흰 부스러기를 떼어내는 일을 배웠다. 음식물 쓰레기들은 눈 깜빡하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한 없이 더럽고 습습한 방식으로 흔적을 남긴 채 사라진다는 것,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제대로 된 체제 없이 운영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주문을 듣고 이모부가 커튼을 열어젖히기 전에 미리 음식을 내보여 소머즈라는 별명을 얻고 석류알과 블루베리, 잘게 썬 사과로 열중해 요거트를 꾸미는 것에서 오는 재미도 있었다. 나는 유일한 10대였고 함께 일하던 직원들은 앉은 자리에서 쯔유에 담긴 수란 3개를 해치우는 나를 귀여워하곤 했다. 나를 제외한 직원들은 5-60대의 어른들이었고 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느 정도 과장된 몸짓과 행동으로 식사시간마다 밥 두 공기를 거뜬히 먹었다.

  하지만 모든 식당들이 그렇듯 매일 같은 인원의 손님들이 오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파트 조식 서비스는 들이는 노력에 비해 정기적인 수입이 적은 편이었고 어느 날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손님이 쏟아져 들어오다가도 단 한 명의 손님 없이 아침 시간을 보낸 날도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모든 것은 입주민의 뜻에 달려 있었기에 어딘가에 불평할 수도, 홍보를 강행할 수도 없었다. 주문이 끊기면 직원들은 완벽하게 세팅된 음식들이 준비된 3평짜리 공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서성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면 이모부 얘기가 흘러나왔다. 늘 혼자 밥을 먹고 커튼 뒤의 세계로 들어오려 들지 않는 이모부의 성질. 규율과 체제 없이 운영되는 조식 서비스의 허점 같은 것들. 직원들은 이모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진 않았지만 ‘우리’에 껴주진 않았다. 우리가 함께 흘린 땀과 눈물 콧물의 세계, 우리가 공유하는 유대감. 그 속에 이모부는 낄 수 없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어느 곳에든 속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나는 내가 ‘우리’ 안에 속해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모부 얘기가 시작되면 불편한 마음이 들어 주방 커튼을 열고 나와 커뮤니티 센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주말이면 커뮤니티 문은 연신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커뮤니티 센터는 출입카드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었다. 아파트 정문은 걸어 들어가면 그만이었지만 이곳, 지하 센터는 달랐다. 지상에 집이 있는, 그 문을 여는 카드가 있는 실거주민들만 오갈 수 있는 한정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물론 나는 카드가 없었고 아침마다 이모부나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발견해 문을 열어줄 때까지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문 너머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려 해도 그건 꼭 비참한 일이었다. 센터 입구에 앉아 카드를 찍고 들어오는 평범한 얼굴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허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들의 얼굴이, 분위기와 차림새가 우리 동네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어 그랬다. 사라 역시 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런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두 달 전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라는 나와 같은 대학의 신입생이 될 예정이었다. 사우나를 하러 온 듯 편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다 문득 몇 살이냐 말을 걸어온 사라는 그런 식의 만남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어쩜 이런 인연이 다 있지? 사라의 고른 이가 환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보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자란 사람 특유의 선량함, 하지만 지지 않는 단호함 같은 것이 그려진 사라의 얼굴엔 구김이 없었다. 부드러운 새틴 블라우스 같았다. 친구의 절반은 지구 반대편에, 나머지 절반은 이제부터 만들어나갈 셈이라 웃으며 말하던 사라는 나에게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건 뒤 자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커뮤니티 복도를 걸어 나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남아 사라가 내게 남기고 간 것들을 멍하니 되짚어 보았다.

  사라의 인스타그램은 열댓 명 정도만 팔로우하고 있는 비공개 계정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어항을 처음 본 고양이처럼 휴대폰을 꼭 쥔 채 낯설고 새로운 사라의 세상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본 적 없는 이국의 풍경들이 작고 네모난 칸 안에 속속들이 들어차 있었고 모든 글은 영어로 적혀있었다. 놀랄 만큼 사랑스러운 사라의 지난 일상들을 더듬더듬 해석하며 나는 단숨에 사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라의 가장 최근 게시글은 이틀 전의 것으로, 석류알과 조각사과로 스마일이 그려진 요거트 사진이었다. 그건 나도 잘 아는 모습으로, 내가 정성껏 차린 음식이었다. 나는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 사진으로 남겨두었으며 그게 사라라는 사실이 운명 같아 기쁘다가 기분이 오묘해짐을 느꼈다. 같은 음식이지만 마주하는 쪽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나는 건네는 쪽에, 사라는 그것을 받는 쪽에 있었고 그건 절대 맞닿을 수 없는 왕복 2400원만큼의 거리였다.

  그 즈음, 나는 개강을 두 달 남겨놓고 있었고 집 안과 밖으로 유입되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혼돈의 시기였다. 아주 많은 것이 전에 없던 방식으로 들이치고 있었고 동시에 무언가 비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새해의 환희와 기쁨 같은 것이 다 가시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죽음이 결정되었다.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살아날 수 없다고,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의사는 말했고 엄마는 집에 와 이 모든 걸 말해주며 약간 울었다. 수의를 준비하고, 영정사진을 찍고, 묫자리와 땅의 계약 기간 같은 것들이 정해졌다. 엄마와 아빠는 하나뿐인 딸의 성년을 축하하는 대신 할아버지의 죽음을 빠르게 준비해야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능숙하게 모든 것을 해낸 뒤 할아버지가 죽기만을, 이렇게 말하면 뭔가 이상하지만 어쨌든 결전의 그 날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날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두 달이 될 수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모든 결정에 내 의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죽음이 결정된 것처럼 재미없는 삶이 또 있을까? 할아버지가 집에 오기로 한 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고 현관문이 소리 내며 열렸다. 할아버지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걸어 들어왔다. 죽을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말하자면 그랬다.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몇 년은 거뜬하게 살 사람처럼 눈빛이 단단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할 것 같지도, 그렇다고 죽음이 다가오는 걸 손 놓고 기다릴 것 같지도 않았다.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고작 두 달 뒤에 삶을 마감한다는 게 말이 되나? 엄마는 미리 비워둔 창고 방에 할아버지를 들였고, 할아버지는 약간 비틀거리면서도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런 여유가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도망치듯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는데 이유는 알지 못했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사실이 별로 없었다. 외동딸인 엄마를 엄하게 키웠다는 것, 젊었을 때 그 시절 사람들이 그랬듯 몇 번의 외도와 놀음을 즐겼다는 것,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철학관을 운영하며 부산에 혼자 살았다는 것. 말기 암을 판정받았고, 하루에 세 번 항생제를 비롯한 십여 가지의 약을 복용해야하며 몸의 내구성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 또한 알았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기에 적합한 유형의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불편한 내 마음과 달리 할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데 적응해갔고 덩달아 엄마와 아빠는 의무적으로 활발해졌다. 종종 백화점 오픈런을 대신 뛰어 소소한 돈벌이를 하던 엄마는 일을 그만두고 아침마다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던 아빠도 동참해 식사를 챙겨먹었고 이쯤 되니 나도 빠질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 역시 아침잠이 없었으므로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마다 네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하는 기묘한 아침식사가 계속되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밥알을 오래도록 씹었다. 모든 게 잘 짜인 연극 같았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고 달려 나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병문안을 가면 늘 눈을 감고 누워있던 할아버지가 서 있다는 게, 두 다리로 땅을 짚고 서서 나와 마주하고 있다는 게 어색했고 그만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우리 집을 돌아다니고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불편해졌다. 할아버지는 죽을 날을 받아두고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살아있었고 같은 공간을 공유해야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래야만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죽는 걸 원하진 않았지만 대학 입학 전까지 없어졌으면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집을 되찾고 싶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많을 것이 바뀔 것이었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있을 테고, 새 친구가 놀러올 수도 있었다. 어쩌면 사라가 집에 놀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내가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은 불청객,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내 공간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집 안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게 된 것과 상관없이 일은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손에 익어 수월해진 아침시간대의 일과 다르게, 잠깐의 휴식 뒤 시작하는 점심시간은 아무리 일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아침과는 메뉴가 조금 달랐고, 이전까지 보지 못한 군상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분명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같은 사람들인데 어쩜 이리 다를까. 아침엔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식사를 즐기기 위한 개인들이 찾아왔다면 점심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곤 했다. 오후 두 시쯤 되면 연회장은 매일 파티라도 여는 것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엄마 손에 이끌려 온 아이들이 마룻바닥을 뛰어다녔고 오래된 벨벳 커튼이 펄럭이며 만들어낸 먼지들이 부스스 떠다녔다. 제각기의 이유로 불만을 토로하는 손님들을 하나하나 대처하는 이모부를 보고 있으면 점잖고 차분한 아침 손님들이 그리워지곤 했다.

  연회장을 뒤흔드는 크고 작은 사건들도 전부 이때 발생하는 편이었는데 바로 옆에 위치한 헬스장에서 뛰쳐나온 주민이 빵 냄새가 너무 심하다고 화를 낸다거나 카드를 놓고 왔는데 외상이 안 되냐고 묻던 아저씨가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건 애교였다. 이 사업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며 선전포고를 하던 아주머니나 연예인 dc가 안되냐고 묻던 한 아이돌 멤버도 있었고 컨티넨탈 브렉퍼스트 하나만을 시켜놓고 음료 4잔을 요구하는 일가족은 커튼 뒤의 직원들이 우르르 나와 힘을 합쳐야만 일이 해결되었다.

  집 안엔 초대하지 않은 할아버지가, 집 밖엔 종달새처럼 시끄러운 손님들과 닦아야할 수저가 있었다. 나는 집안과 밖,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고 그래서 집밖으로 나가 사라와 어울려 다니는 편을 택했다. 내가 지하철을 타 7호선 반포역에 내리면서 우리의 우정은 지속될 수 있었다.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눈을 떠 옷을 챙겨 입고, 침묵의 아침식사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모든 일을 해낸 뒤 지친 몸으로 커뮤니티 소파에 앉아 있으면 사라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부드러운 장미향이 나는 사라의 팔짱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즐겁게 놀았다. 삶의 절반을 런던에서 보낸 게 무색하게도 사라는 압구정과 로데오거리, 도산공원의 브런치 맛집을 꿰고 있었으므로 모자랄 게 없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모든 곳에 갈 수 있었다. 1월 중순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사라의 팔짱을 끼고 걸으면 그런 건 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됐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길거리의 못생긴 조형물도, 사라가 정류장에 지갑을 놓고 온 일도, 바람에 날아가는 나뭇잎도 우리의 웃음거리가 됐다. 사라는 높은 음으로, 나는 낮은 음으로 깔깔깔 웃었고 불협화음의 듀오는 끝없이 웃었다.

  사라와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삼만 삼천 원짜리 우니 파스타를 먹을 수 있었고 오만원이 훌쩍 넘는 망고빙수를 먹을 수도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색색의 휘핑이 둘러진 스무디를 먹기 위해 칠천 원이고 팔천 원이고 낼 수 있었다. 사라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간단해졌다. 사라에겐 모든 것이 살 수 있는 것과 사지 않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 천장이 낮은 갤러리아를 걸었고 명품관을 손쉽게 들락날락거리며 살 수 있지만 사지 않는 것들을 손으로 훑었고 스무 살이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행동들을 부끄럼 없이 전부 해냈다.

  매일 저녁을 함께 보내며 사라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리는 펼쳐질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또 얘기했고 지나간 과거를 되짚으며 박수를 쳤다. 너도? 나도! 나도 그 노래를 좋아해. 사라가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를 걸으며 들었던 노래를 나 역시 미아사거리를 오가며 들었고 나는 사라와 내가 같은 운명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영원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사라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나는 사라와 나의 우정이, 고양된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밤늦게까지 로데오 거리를 걷고 한강공원을 쏘다니면 그 거리가 내 것처럼 느껴졌다.

  사라와 어울려 놀다 밤늦게 들어온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내 방에 들어온 적이 있다. 압구정의 한 루프탑 바에서 십오만 원이 넘는 돈을 쓰고 온 날이었고, 쉴 새 없이 털어 넣은 진토닉과 럼주, 가지각색의 칵테일 때문에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침대에 뻗어있을 때였다. 밖에서 입던 옷을 입고는 침대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나는 그날 입은 모든 옷을 바닥에 벗어던진 채 침대에 모로 누워 자고 있었다. 침대가 너무 빨리,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참을 수 없이 어지러워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방안에 있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은 외부인이 내 방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허락하지 않은 공간에 함부로 침입해 있었다. 화가 났지만 알코올이 내 모든 근육을 저지시켰으므로 나는 실눈을 뜨고 화장대 앞에 선 할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온갖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화장대 앞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바라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잠시 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화장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떨리는 손을 볼 수 있었다. 화장솜과 면봉, 숙취 해소제 껍질을 신중하게 주워 한 손에 담은 할아버지는 천천히 걸어 방을 나갔다. 나는 아직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침대에 누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그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다시 방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고 순간 상한 고기 냄새가 훅 끼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밤이 다 지난 후였다. 일요일의 태양이 방안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어제 내가 본 광경을 떠올려보려 노력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밑에 어제 입었던 옷이 가지런히 개여 있었다. 화장대가 깨끗했다. 나는 지난 밤 할아버지의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청소가, 나에게 지불하는 세라는 걸 알았다. 반듯하게 접혀있는 니트를 들어 코를 대니 고소하고 꿉꿉한 냄새가 났다. 죽어가는 털 짐승의 냄새였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모부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일했지만 조식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특히나 성적이 부진한 아침시간의 수요를 늘리기 위해 이모부는 딜리버리 서비스를 생각해냈다. 아침 7시부터 11시 사이에 주문을 하면 조식을 집 앞까지 배달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구차한 짓까지 해야 할까요, 라고 말을 꺼낼 수 없어 나는 이모부를 따라 아파트 구석구석을 누비는 쪽을 택했다. 주문 수는 열 건이 채 안되었지만 몇 달치를 정기신청한 사람이 있어 우리는 매일 같이 포장용기에 조식을 담으며 아침을 시작했다. 하루의 30분을 꼭 함께 하면서 이모부와 나는 전에 없던 끈끈함을 내재하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그건 전우애 같은 것이었다. 남의 집 문을 두들기고, 스프가 식었다는 항의 전화를 받고,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들을 해내면서도 이모부는 세련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이모부가 웃으며 돌아볼 때마다, 엘리베이터를 잡고 수련아 빨리 와라! 소리칠 때마다 나는 이모부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부드러움이, 빼곡히 쌓인 시간의 겹이 무서웠다. 언젠가는 그것이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가 떴는지 안 떴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지하주차장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침을 들고 뛰었다. 살면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를 외제 차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자꾸만 속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고작 스물이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런 것들이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것. 내가 노력해도 가닿을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앞으로 내가 겪게 될 미래와 이 아파트 내부의 사람들이 마주할 미래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어버렸는데 거기엔 사라의 몫이 컸다.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조식서비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대백화점 블랙 자스민 라운지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사라가 너는 힘든데 왜 일을 하는 거야? 물었고 나는 무엇부터 말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 거렸다. 이모부가 새 사업을 시작했고 이모부와 우리 아빠가 친형제 같은 사이니까, 모르는 사람과 일하는 것보단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이모부 밑에서 일하는 게 편하니까. 하지만 나는 이모부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미리 배워보고 싶었다고, 전공과 관련되지 않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어. 그런 말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내가 조식 서비스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보이자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남의 입을 통해 듣는 이모부의 이름이 생경했다.

  “카운터에 있는 아저씨 있잖아, 단발머리에 삐쩍 마른, 너희 사장님 말이야. 카페에서 말 엄청 많은 거 알고 있어?”

  아파트 입주민들이 공유하는 비공개 카페 얘기였다. 이모부가 스치듯이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악의적인 조식 후기를 올린다고 했다. 과일이 무르고 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우리가 만든 적이 없는 걸 먹었다고 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는데 사라는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 카페에서 조식 서비스 반대 운동이 열리고 있다고 했다. 동대표인 이모부가 집주인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108동 동대표 사실은 월세 산다고, 자신에게 매달 월세를 지불하는 세입자에 불과하다는 글이 올라왔고 많은 사람들이 동요했다고. 우리 엄마도 인정 안한대. 집주인도 아닌 게 어떻게 동대표가 되냐고. 그치 않아? 그렇게 되물으며 나를 바라보는 사라의 눈망울이 너무 맑아서, 악의 없는 그 미소가 아름다워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웃었다. 사라가 계속해서 말해주는 이모부의 추악함, 과거, 잘못된 사실 중 나는 무엇도 정정해주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이모부는 충남사람이고 이모와 사이가 아주 좋아. 이모부 아들은 내가 업어 키운 거나 마찬가지고 걔는 누굴 때린 적이 없어. 나는 다 알고 있었지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사라가 줄줄이 늘어놓는 거짓을 듣고만 있었다. 그 순간에 내가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하면 나를 향해 열린 사라의 마음이 순식간에 닫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는 편을 택했다.

  나는 사라와 같은 세상에 살 수 없었다. 우리는 같은 걸 먹고 같은 걸 보면서도 동등한 마음을 나누지는 못했다. 그때의 나는 모르고 사라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모부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라가 팔을 끌어당겼다. 조금만 더 있다 가자 수련아. 나 아직 커피 다 안마셨어. 커뮤니티에 가자 말했을 때 동그랗게 모이던 사라의 눈과 입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미세하게 찌그러진 눈썹도. 이 시간에 왜? 넌 거기 안 살잖아 …

  그래 그렇지. 난 외부인이지. 세입자도 될 수 없는 완벽한 타인. 시간당 8720원을 받고 일하는 알바생. 그뿐이니까 …. 라운지를 나와 뒤돌아보았을 때 사라는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도 지지 않는 미소였다.

  사라와는 이틀 뒤, 커뮤니티 입구에서 다시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사우나를 나왔다는 사라가 문을 열어주었다. 내겐 카드키가 없었다. 이모부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사라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라가 카드를 찍어 커뮤니티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랄하게 물어왔다. 오늘 지각이겠네? 어깨를 살짝 쥔 손이 다정해서, 사라만의 부드러운 장미향이 참을 수 없이 달콤해 나는 대답하지 않고 사라를 스쳐 연회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 마음이 다시는 펴질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는 것을 알았다.

  손님이 없어, 아침이 다 지나도록 손님이 없어 나는 창고에 들어가 깍두기를 잘랐다. 매장용 냉장고 두 대 사이에 쭈그려 앉아 한 없이 구겨진 얼굴로 포대자루에 담긴 깍두기를 서걱서걱 잘랐다. 가위가 잘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내가 그토록 바랐던 일이 이루어졌음을 전해 들었다. 개강까지 일주일, 나는 마침내 나의 집을 되찾았다.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돈을 벌고 있으니까.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가위질을 했고 지금 내가 너무도 빠르게 어른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자루를 들고 나와 이모부에게 소식을 전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문자를 보냈다. 개강이 얼마 남지 않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겠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저녁 즈음에 이모부는 간결한 답을 보내왔다. 그래 고생했다. 할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나는 그렇게 일을 그만두었다.

  이제 나는 전자레인지에 냉동밥을 데우는 대신 도록도록 소리를 내며 갈리는 원두를 받아 커피를 내린다. 많지 않은 양의 수저를 닦고 웃으며 주문을 받는 스무 살이 되었다. 엄마는 아직도 해외직구와 중고거래를 애용하고 핫딜이 떴을 때 저렴하게 구매한 두 개의 가방을 번갈아 든다. 모서리가 까진 샤넬 클러치는 더 이상 들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에 두고 온 절반보다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된 사라는 더 이상 나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개강 후, 나는 사라를 본 적 있다. 도서관의 중앙계단에서 서로를 스쳐 간 우리 중 누구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과거의 모든 일은 아득히 멀어졌다. 나는 엄마로부터 이모부의 조식 사업이 무산되었음을 전해 들었다. 이모부는 이사를 간다고 했다. 누구의 아침도 차려줄 필요가 없는 다른 아파트로.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장례식 이후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짐이 사라진 창고 방이 익숙해질 즈음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둘러 모여 아침을 먹지 않았다. 아빠는 다시 아침을 거르고 출근했고, 엄마는 새벽수영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 오직 나만 꼬박꼬박 아침밥을 챙겨먹게 되었다. 1교시 수업이 있던 날, 나는 냉장고에서 밥과 반찬을 꺼내 상을 차렸다. 반찬은 진미채 하나뿐이었다. 몇 주 전 엄마가 한 냄비 째 만들어 냉장고에 소분해놓은 것이었다. 식사를 하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눈을 마주쳤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입을 오물대고 있었다. 씹을수록 외로워지는 진미채를 씹고 또 씹고 있었다. 돌아가는 걸 까먹은 것 같았다. 더 이상 할아버지를 위한 아침은 없다고, 아무도 할아버지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각자의 식사에 집중했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아 오래도록 아침을 먹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짧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

올해 의혈창작문학상의 응모작들은 참신하고 도전적인 작품들이 많아 매우 반가웠다. 하지만 패기가 너무 앞선 나머지 개연성과 사유의 깊이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작품, 문장의 완성도가 부족한 작품들이 많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은 구성이 탄탄하고 에피소드가 풍부한 <방백>과 <세입자를 위한 아침>이었다.

  이 두 편의 소설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돋보였다. 생명을 게임처럼 가볍게 다루는 소설들 사이에서 죽음을 성찰하는 진지한 시선도 좋았다.

  <방백>은 여러 겹의 심리적, 현실적 층위가 눈길을 끌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으로부터 레스토랑 예약권을 받고 낯선 장소를 찾아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형체도 색깔도 짐작이 되지 않는 고기를 먹는 장면은 생생하고 참신했다. 이러한 장면들은 이 세상과 삶에 만연한 육식성과 폭력성을 은유하며 우리 안에 묻어둔 죄의식, 윤리의식을 일깨우고 성찰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방백’의 형식으로 구축된 소설인지라 시종 화자의 눈과 입으로 설명되면서, 더러 과도하게 노출되는 감상적 접근이 아쉬웠다.

  <세입자를 위한 아침>은 짧은 이야기 안에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근래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는 계층 간의 문제, 그들 사이의 배타성이나 폐쇄성, 집단이기주의, 혐오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우리는 타인을 어느 선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집에 온, 즉 나의 영역을 침범한 할아버지나 화자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과 성장배경을 가진 ‘사라’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에 걸친, 성인의 세계로 입사하는 시간을 아프지만 건강하게 형상화했다. 죽은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묵묵히 밥을 먹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가의 소설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참신하고 내밀한 작가의 시선과 사유를 높이 평가한 우리는 <세입자를 위한 아침>을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올해 당선의 기회를 얻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도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오정희·방현석(본심) 박혜영·김종광(예심)

 

소설 부문 장원 김금비 학생 Interview: 곱씹을수록 외로워지는

사진제공 김금비
사진제공 김금비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세입자를 위한 아침> 속 주인공 ‘수련’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세상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김금비 학생(동덕여대 문예창작과)은 그런 수련과 경험을 공유하며 스무 살 무렵 느꼈던 감정을 글에 실어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요.
  “올해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해예요. 오래 소설을 전공하면서도 삶에 소설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휴학 후 생각해보니 제게 남은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어느 때보다 많이 읽고 고민하며 괴로워한 해였는데 그 시기를 인정받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해당 소설은 어떤 영감을 받아 쓰셨는지 궁금해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시작한 첫 아르바이트가 소설 속 아파트 조식 일이었어요. 함께 일했던 이모부께서 늘 조식에 관한 소설을 써보라고 하셨는데 쓰고 보니 아파트 조식보단 그걸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를 쓰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느낀 감정에 집중해 쓰려 노력했죠.”

  -<세입자를 위한 아침>이라는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제목을 먼저 지은 후에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단어 ‘세입자’의 중의적인 느낌이 좋아서 제목에 사용했죠. 남의 공간을 빌려 쓰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여러 의미로 교차됐으면 했어요. 특정 인물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등장인물과 어우러지며 읽히길 바랐습니다.”

  -주인공 수련이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설정을 넣으셨는데요.
  “할아버지는 수련의 부끄러움을 대신하는 사람이에요. 동경하는 세계에 유입되고 싶으면서 자신의 세계가 침범당하는 게 불편한 수련의 모순적인 마음에 관해 쓰고 싶었죠. 사람은 누구나 보여주고 싶은 면만 드러내려 하고 결함이 드러나면 부끄러움을 느끼니까요.”

  -소설 속 아파트는 어떤 의미일까요.
  “아파트는 계층 간의 격차를 잘 보여주는 장소고, 함부로 침범할 수 없이 단단한 세계잖아요. 수련과 ‘사라’, 수련과 할아버지의 관계를 통해 열등감과 배타성이라는 감정을 교차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작 스무 살에 많은 걸 알게 된 수련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노력해도 가닿을 수 없는 세계에 관해 말하고 싶었어요. 특히 어렸을 땐 그 불공평함을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그런 점에서 수련이 남들보다 빨리 세상을 이해하고 어른이 돼가는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어렸을 땐 무작정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두려움도 열등감도 무엇이든 다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계속해서 쓰는 사람, 느리더라도 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이 제 글을 읽는다고 상상할 때마다 기분이 묘해요. 이상하고 기쁘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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