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 ‘국가 폭력’
  • 장민창 기자
  • 승인 2021.11.29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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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았던 권력의 무자비함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국가는 국민을 향해 수많은 폭력을 자행해왔습니다. 이를 국가 폭력이라고 합니다. 국가는 국민을 향해 과도한 공권력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4.3사건부터 시작해 정부 차원에서 작성한 블랙리스트 문건까지. 여전히 우리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국가 폭력의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계엄군의 모습. 사진제공: ⓒ이창성(5·18기념재단)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계엄군의 모습. 사진제공: ⓒ이창성(5·18기념재단)
4.3 사건 당시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사진제공: 제주 4.3아카이브
4.3 사건 당시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수용자들. 사진제공: 제주 4.3아카이브

 

손이 묶인 상태로 계엄군에 끌려가는 어린 학생. 사진제공: ⓒ이창성(5·18기념재단)
손이 묶인 상태로 계엄군에 끌려가는 어린 학생. 사진제공: ⓒ이창성(5·18기념재단)
삼청교육대에서 목봉 체조 중인 입소자들. 사진제공: KTV
삼청교육대에서 목봉 체조 중인 입소자들. 사진제공: KTV

국가 폭력, 수많은 피해자 낳아
물리력 줄었지만 아직 우리 근처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약 70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약 70년 동안 정치와 경제 등 사회 곳곳에서 무궁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통증도 있었다. 국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에 저항하던 이들은 권력의 총과 칼에 맞아 목숨을 잃어야 했고 많은 희생을 거치고 나서야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발생했던 여러 국가 폭력의 문제점을 관찰해봤다. 

  ‘좌우 이념’이라는 포화 속에서 
  4.3 사건과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국가 폭력의 한 사례였다. 이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국민들은 이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총과 칼에 의해 무고하게 목숨을 빼앗겼다. 

  4.3 사건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 및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많은 제주도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장규식 교수(역사학과)는 4.3 사건 발생 원인으로 남북 분단을 지목했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됐는데 제주도에서 반대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48년 정치 상황은 4.3 사건을 불러온 하나의 원인으로 주목돼야 합니다.” 

  해당 사건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에서 기인한다. 당시 좌익계열 남로당이 3.1절 경축을 명목으로 대규모 군중 집회를 개최했고 그 과정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다. 이후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해 총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다. 이는 해당 사건의 촉매제로 작용했고 이후 제주도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돼 강도 높은 진압 작전이 시작된다. 4.3 사건은 1954년까지 지속됐다. 

  장규식 교수는 4.3 사건을 제주도의 특성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외지인들이 제주도로 오게 됩니다. 이후 그들은 좌익 세력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죠. 제주도민들은 육지 사람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좌익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수만 명의 보도연맹원이 6.25 전쟁 중에 군과 경찰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하기 위해 설립된 관변단체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정부는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구금하기 시작했고 후퇴와 함께 이들을 집단 학살했다. 

  장규식 교수는 보도연맹원을 향한 정부의 집단 학살을 예방 학살이라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남침해서 더 내려오면, 보도연맹원들은 그들을 호응하는 세력이 될 거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승만 정부는 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보도연맹원들을 예방 학살을 한 거예요. 국가 폭력이라고 할 수 있죠.” 

  정당성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다 
  1980년대에 국민들은 군사정권의 권력과 반인권적 행태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군사정권은 총으로 국민들을 진압하려 했고, 많은 이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이 이를 방증한다. 

  박정희 사망 후 박정희 시해 사건 조사를 담당했던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이후 전두환은 신군부 세력과 함께 12.12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권력의 중심에 다다른다. 

  1980년 봄, 국민들은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위한 뜨거운 목소리를 외쳤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내렸고 이는 5.18 시작에 불을 붙였다. 5월 18일 오전 광주에 계엄군이 투입돼 광주시민과 군인이 충돌했고 이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은 당해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민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다. 이는 광주시민의 큰 분노를 일으켰다. 박진우 5.18 기념재단 연구실장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 계엄군은 ‘앉아 쏴’ 자세로 시민을 조준 후 발포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처음 총소리를 들고 공포탄인 줄 알았다고 해요. ‘설마 군인들이 국민들을 향해서 총을 쏠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시민들은 더 이상 군인들을 ‘국민을 지키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총을 들게 됐어요.” 

  5.18은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으로 인해 종료됐다. 5.18의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아직까지 공식적인 사상자 수가 집계되지 않았다. 양재평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은 5.18 당시 벌어진 국가 폭력을 신군부 세력의 절실함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5.18을 탄압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절실함과 위기의식이 신군부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이끌었다고 봅니다.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서라면 자국민도 학살할 수 있다’는 무자비한 권력의지를 확인시켜 준 셈이죠.” 

  7년 뒤인 1987년에 대한민국 정국은 또다시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1987년 4월 13일 ‘호헌 조치’를 발표한 전두환 정권을 향해 저항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당해 1월 발생한 박종철 학생 고문 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됐다는 소식이 드러났다. 이에 국민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했는데 당시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전 국민이 거리에 나오게 하는 기폭제가 됐으며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최종숙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전두환 정권 국가 폭력의 원인을 두고 ‘정권의 정당성’을 언급했다.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간접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어요. 정부의 정당성이 없었다고 봅니다. 정당성 없는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물리력을 동원해 국민들을 억압하며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삼청교육대라는 낙인 
  이처럼 대한민국 근현대사에는 무력을 이용해 국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자행한 사례가 만연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민 개개인을 향해 국가 폭력을 단행한 일도 간간이 발생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삼청교육대’다. 

  5.18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한다. 그들은 사회정화작업을 추진하는 일환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3만9742명이 삼청교육대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삼청교육대는 인권 유린의 온상지였다. 

  서채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삼청교육대 설치를 두고 ‘존엄성 자체를 침해할 수 있을 정도의 위헌적 범죄 행위’라고 진단했다. “삼청교육대는 국제 인권 기준과 헌법에 정확히 배치되는 인권 유린 행위입니다. 법에 따르지 않고 그저 사회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자의적으로 사람을 검거해 삼청교육대로 끌고 갔다는 것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죠.” 

  서채완 변호사는 삼청교육대를 갔다 온 사람들을 향한 사회적 낙인이 더욱더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까지 피해자들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삼청교육대를 단순히 불량배 소탕 작전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잡혀간 사람들 모두가 불량배는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삼청교육대를 갔다 온 것만으로 불량배로 사회적 낙인이 찍혀버렸어요. 이로 인해 그들은 더욱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블랙리스트는 은밀한 문서 
  6.29 민주화 선언 이후 더 이상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국가 폭력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직 국가 폭력의 뿌리는 완전히 뽑히지 않았다.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을 특정해 은밀하게 사찰하고 괴롭히는 방식의 국가 폭력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2017년 9월 국가정보원 개혁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당시 작성했던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 82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2018년에는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졌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도 공개됐다. 해당 블랙리스트에는 947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와 관련해 안병호 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문건의 존재 자체가 피해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문건 작성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사회적 참사에 동감하는 마음으로 서명을 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관리 대상으로 염두에 둔 행위입니다. 이 자체로 피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이어 안병호 전 위원장은 블랙리스트를 막고자 하는 의지조차 확인되지 않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배제된 사람의 예술 활동 자유와 일할 권리는 사라졌습니다. 블랙리스트에 가담한 사람들에 관한 명확한 처벌이 없으니 계속 예술 활동을 해도 될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죠.” 

  이러한 종류의 문건은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환경단체에도 있었다. 올해 3월 환경단체들은 국정원에 관련 정보 공개를 요청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살리기 반대 세력 연대 움직임에 선제 대응’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관련 단체를 사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환경 단체는 해당 사찰을 규탄하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집회를 진행했다. 

  김종원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정권의 해당 행위를 ‘음지에서의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폭력이 직접적 수단이 되지 않으니 다른 방식으로 국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고 봅니다. 이는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음지에서의 활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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