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대로, 그대로, 을지로
  • 권지현 기자
  • 승인 2021.11.29 0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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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세운 옥상에서 본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모습. 거리를 따라 즐비한 상공업사는 오늘도 을지로의 불을 밝힌다. (우) 명진시보리가 위치한 을지로 15길. 이전부터 을지로를 지켜 온 각종 공업사의 손간판이 눈에 띈다.사진 최수경 기자
(좌) 세운 옥상에서 본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모습. 거리를 따라 즐비한 상공업사는 오늘도 을지로의 불을 밝힌다. (우) 명진시보리가 위치한 을지로 15길. 이전부터 을지로를 지켜 온 각종 공업사의 손간판이 눈에 띈다.사진 최수경 기자

“이 골목에 상주한 지 30~40년 됐으면 여기 오가는 사람은 거의 다 알죠. 아침에 출근하면서 보면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골목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농담도 하고 술도 같이 마실 정도로 친근하고 정겨워요.” 
-최진일 명진시보리 사장 인터뷰 중

을지로라는 나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잎’과 ‘뿌리’가 중요하다. 그 뿌리는 좁은 골목에 있다. 바로 아무도 없을 것 같은 골목에서 여전히 땀 흘리며 일하는 장인들이다. 청년 문화예술가들은 을지로에 문화예술이라는 새로움을 불어넣어 ‘힙지로’라는 잎을 피워냈다. 낯설고 새로운 경험으로 을지로에 많은 이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을지로를 삼킨 젠트리피케이션 
  자본이 부족한 청년 문화예술가는 상대적으로 을지로를 선호했다. 상업화된 다른 지역과 달리 을지로의 임대료는 저렴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도 ‘세운상가’ 일대의 장소적 가치를 인정해 재개발을 중단하고 도시재생 전략 계획인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로 작업 공간이 필요한 예술가에게 공간을 지원하기도 했다.

세운상가에 위치한 세운부품도서관 기획전시 ‘을지로 산업도감’. 오랜 기간 서울과 함께해 온 제조업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사진 최수경 기자
세운상가에 위치한 세운부품도서관 기획전시 ‘을지로 산업도감’. 오랜 기간 서울과 함께해 온 제조업 현장을 경험할 수 있다.사진 최수경 기자

  하지만 임대료 상승을 피할 수 없었다. 힙지로 열풍이 불면서 을지로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카페와 갤러리 등이 새로 유입되면서 지가가 오르고 이는 임대료 상승을 불러온다. 청계천-을지로 보존을 위해 활동하는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활동가는 임대료 상승에 따른 위험에 관해 설명했다. “을지로에는 머문 지 30년 이상 된 상공인이 많아요. 임차법이 개정돼도 이들이 전부 보호받을 수 없죠. 특히 카페나 갤러리는 임대료 상승을 더욱 가속화해요.” 결론적으로 을지로라는 공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을지로에서 약 30년간 시보리(돌림판으로 둥근 기물을 가공하는 작업)를 해온 명진시보리를 운영하는 최진일씨는 재개발로 을지로 상공인이 내몰리는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내몰리는 입장에서 우리는 상당히 허탈합니다. 점포 직원들이 2~3명 정도거나 혼자 일하는 사람도 많은데 쫓아낸다고 하니 상당히 괴롭죠. 특히 변두리로 나가게 되면 고정 거래가 없어지기 때문에 일이 안 들어와서 더욱 힘들어지게 됩니다.”

세운상가 일대에서 진행 중인 세운 4구역 재개발로 세운상가의 상인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사진 최수경 기자
세운상가 일대에서 진행 중인 세운 4구역 재개발로 세운상가의 상인들은 혼란을 겪고 있다.사진 최수경 기자
명진시보리의 작업장. 재개발로 내몰릴 위기에 처해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작업장을 지킨다.사진 최수경 기자
명진시보리의 작업장. 재개발로 내몰릴 위기에 처해있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작업장을 지킨다.사진 최수경 기자

  작은 날갯짓이 누군가에겐 태풍 
  재개발 및 도시재생 사업으로 을지로의 모습이 변화하면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박은선 활동가는 생산 공간으로서 을지로의 가치가 사라지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언급했다. “모든 기업과 개발 산업의 뿌리는 제조업이에요. 제조업이 이뤄지는 생산 공간이 늘어나야 고용률도 높일 수 있죠. 또한 적은 양의 작품이나 기계 제작을 원하는 미대생에게 청계천-을지로 일대는 직접 기술을 배우고 기계를 만들기에 좋은 여건을 제공해요. 이 공간이 없어지면 많은 제조업이나 예술 생태계가 큰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아요.”

  최진일씨는 재개발로 인해 점포 간 상생과 이웃 간 정겨움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했다. “손님에게 다른 점포를 소개해주며 기술직 점포끼리 서로 도움을 주곤 했어요. 오래된 만큼 을지로 골목에 있는 사람들과 친근감도 있죠. 그런데 점포가 줄면서 손님도 줄었고, 이곳을 떠나게 되면 이 사람들을 아예 볼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을지로가 단순히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었다. 김성호 커넥티드북스토어 대표는 지금 행해지는 예술 프로젝트가 일시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예술 거리라고 하면 시즌별로 왔을 때 새로운 감흥을 받아야 하잖아요. 계속 똑같은 그림만 노출되면 무슨 감흥을 받겠어요. 벽화 같은 경우는 한 번 그리면 끝이니까 그냥 볼거리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업인 거예요.”

  모두를 위한 을지로를 꿈꾸며 
  모두가 행복한 을지로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배웅규 교수(도시시스템공학전공)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정적인 측면을 없애려면 도시재생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도시재생의 역할은 오래된 특화 거리가 내몰리는 등의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새로운 개발과 기존 도시의 정체성을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도시재생이 이뤄지죠.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또는 사라지는 속도를 늦추는 노력이 있어야 도시가 바람직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을지로 내 ‘상생’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다. 김성호 대표는 기존 상공인과 청년의 상생을 추구하는 인력이 많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공업 종사자와 청년 사업·예술가의 접점을 만들어주는 기획자가 많이 필요하죠. 을지로에 방문하는 MZ세대를 끌 수 있는 상품을 기획해서 유동인구가 많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노화동 선진플러스 부설 디자인연구소장은 상인들 간, 상인과 건물주 간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익만 추구하기보다 함께 협력했을 때 지역이 살아날 수 있어요. 서로가 상생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지원 정책이 절실히 필요하죠.”

  서울미래유산과 백년가게 등 보존 가치가 있는 가게가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를 보완할 필요도 있다. 을지OB베어는 서울미래유산과 백년가게로 지정됐지만, 임대계약 연장과 관련해 건물주와 소송이 일어났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가게를 비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배웅규 교수는 영업을 위한 실질적인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칭만 정해주는 박물관식 유산 보존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요. 그 가게들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영업 행위를 지속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을지로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꿈꾸는 을지로는 어떤 모습인가요.” 그들은 대답했다. “그냥 지금, 이대로의 을지로로 남으면 좋겠어요.”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쉬울 듯하면서도 가장 어렵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에서 을지로 재개발을 위한 밑그림을 다시 그린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진정 을지로를 위한 모습일까. 을지로를 보존하기 위해 누군가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이제는 모두가 을지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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