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는걸요
  • 이서정 기자
  • 승인 2021.11.29 0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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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화 <벌새> 속 영지의 대사입니다.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몸집을 가진 조류임에도 하루에 자기 몸의 3분의 2 정도로 꿀을 먹습니다. 살기 위해 그만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땅에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 작고 얇은 날개로 숨 가쁘게 날갯짓을 하죠. 벌새의 모습에서 현실에 치여 쉴 새 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 건 기자의 오만한 착각에 불과한 걸까요.

  올해 동아일보와 잡코리아가 2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열에 여덟 명이 ‘평소 우울감이나 좌절감을 겪는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것이 ‘매일 반복된다’고 한 사람들은 약 16.3%였고요. 기자 역시 끝이 없는 일과 쌓여가는 피로, 삶에 대한 회의감에 숱한 감정으로 점철됐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위기의 순간이자 모두가 겪는 성장통일 수 있죠. 어느 날은 ‘번아웃 증후군’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처음 사용한 번아웃 증후군은 글자 그대로 다 불타서 없어진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증상이죠.

  그렇게 열정이라는 땔감이 더 이상 기자 자신을 타오르게 하지 못할 때 봤던 영화였기 때문일까요. <벌새> 속 영지의 편지가 스쳐지나가지 못한 채 가슴 깊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영지는 그것이 ‘삶’이라고 편지에 적어두었습니다. 어쩌면 이 담백한 메시지가 <벌새>의 러닝타임 138분 내에 녹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여정이 늘 멋지고 완벽할 수만은 없습니다. 행복할 땐 웃음 짓고, 잔뜩 지쳐 널브러져 있고. 때론 버럭 화를 내거나 목 놓아 울면서도 내일의 발걸음은 내디뎌야만 하죠. 살아있는 자체로 반짝인다는 진부한 말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독 지쳐있던 기자에게, 그 당연한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한번쯤은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삶이 자격 없이 충분하고, 조건 없이 유의미하다는 것을 말이죠.

  화면 속 영지를 따라 슬쩍 두 손을 올려봅니다.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이는 손을 보고 있으니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당연하게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죠. 문득 가장 좋아하는 시 하나가 뇌리를 스쳐갑니다.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 안희연 <슈톨렌> 中 -
 

이서정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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