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학사가 진행된 지 벌써 두 해째다. 어느 날 학교 소식을 기웃거리던 중 310관(100주년기념관) 참슬기식당과 카우버거에서 비건 학식을 제공한다는 반가운 기사를 보았다. 이제 정문까지 나가지 않아도 비건 식사를 할 수 있게 됐구나 싶어 신이 났다.  

  비거니즘이란 모든 동물의 삶을 존중하고, 착취에 반대하는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다. 나는 ‘비건 지향인’이다. 시작의 순간은 이제 흐려졌다. 자연스러운 시작이었고 실천하지 못한 날도 많았기 때문이다. 종종 스스로를 비건이라 말하기 부끄러웠다. 소심하게 메뉴를 골랐고 도망치듯 밥을 먹었다. 이런 날은 꼭 얼굴을 가린 채 깊숙이 숨고 싶었다. 

  하지만 내 얼굴과 언어를 뒤덮은 이 부끄러움은 더 많은 얼굴을 보도록 했다. 얼굴이 갖는 의미는 크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얼굴은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드러내 보여주는 존재 방식이다. 이 얼굴은 함부로 예측하기 힘들며 ‘아는 얼굴’도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이다. 내 비거니즘 실천 계기도 대단한 사명이나 끔찍한 계기가 아닌 ‘얼굴보기’였다. 은사님과 식사 자리에서 정갈한 젓가락질로 적양파를 쏙쏙 골라 먹던 친구. 내가 존경하는 그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얼굴을 마주 봤다. 그날 집에 돌아가 채식은 못 하겠다는 안일한 말을 뱉었지만 마음에 불편함이 남았다. 그 후 함께 사는 고양이의 얼굴을, 눈을 더 오래 봤다. 어떤 동물은 사랑하고 어떤 동물은 먹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내게 ‘비건 되기’는 동물 사용에 대한 경멸보다는 그러지 않았을 때 느끼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의 얼굴을 보는 일이었다. 다수의 사람에게 태어남과 죽음이 일련의 과정이라면 소비 대상이 되는 동물의 탄생 바로 옆에는 죽음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우리의 삶과 생명이 과정이 되길 바랐다. 

  이타주의에 빠져 우월감을 얻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비난할 마음도 자격도 없다. 비거니즘을 비롯한 동물권 운동과 환경운동은 종래 이타주의를 넘어 실천해야 한다. 나 역시 이기심과 이타심이 일치하는 행복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두려움과 동정에 기인해 따르는 의무감보다는 ‘더 알면 더 사랑하게 된다’는 굳게 믿는 가치를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 허나 지구 돌봄이라는 과제는 이제 몇몇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 전체의 의무가 되어야만 한다. 

  비난과 귀찮아질 일상이 두려워서 여러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면 용기 내어 한 번 마주해보자. 종종 놀림 받고 자주 귀찮아질 수 있지만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당신의 얼굴을 채울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이어진 더 많은 존재의 얼굴도. 우리가 비슷한 질병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비슷하고도 다른 얼굴을 마주하길 바란다.

김지원 학생 
사회복지학부 4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